[프리미엄 리포트]“편의 봐줄테니 쌀화환 보내라”… 지역구행사 열어 손 벌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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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편법 후원금 모금 甲질]
국회의원 입법로비 수사 1년 그후… 돈줄 막힌뒤 교묘해진 모금

화환 대신 쌀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장 앞에 한 민간기업으로부터 배달된 ‘쌀화환’이 놓여 있다. 최근 국회 의원실에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화환 대신 지역구 생색내기용으로 쓸 수 있는 쌀화환을 선호한다고 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화환 대신 쌀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장 앞에 한 민간기업으로부터 배달된 ‘쌀화환’이 놓여 있다. 최근 국회 의원실에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화환 대신 지역구 생색내기용으로 쓸 수 있는 쌀화환을 선호한다고 한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19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300명 중 2011년부터 2014년 7월까지 출판기념회를 1회 이상 개최한 의원은 194명, 개최횟수는 총 279건이나 됐다. 그러나 출판기념회가 금지된 지난해 8월 이후 책을 발간한 의원은 단 4명뿐이었다. 바른사회시민회의가 6일 집계한 결과다.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대 모금 창구가 막히자 책을 내려는 의원도 급감한 것이다. 이옥남 바른사회시민회의 정치실장은 “의원들이 결국 돈 때문에 책을 출판했던 것이라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난해 8월 입법 로비 수사 이후 국회의 풍속도는 크게 바뀌었다. 입법 로비 수사가 의원과 이익단체의 검은 고리를 끊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러나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자금이 많이 필요한 상황에서 돈줄이 막히자 국회의 갑(甲)질도 더욱 교묘해지는 부작용을 낳았다. 기관이나 단체 등의 입법 로비도 물밑에서 더욱 은밀히 진행될 거라는 우려도 있다.

○ ‘돈 가뭄’에 늘어난 ‘갑질’

지난달 의원실 주최로 토론회를 준비하던 A 비서관은 연락이 온 유관기관 담당자들에게 “화환을 보낼 거면 ‘쌀화환’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A 비서관은 “10, 20kg짜리 쌀을 받으면 지역구 동주민센터 등에 보내 생색을 낼 수 있다”며 “다른 의원실에서 하는 것을 보고 벤치마킹했는데 토론회 한 번에 쌀 390kg이 들어왔다”고 털어놨다. 한 국회 관계자는 “B 의원은 산하기관에 편의를 봐주는 대신에 ‘쌀을 지역구 봉사단체에 보내 달라’고 거래를 하기도 했다”며 혀를 찼다. 일부 기관에서는 쌀을 현물 대신 쿠폰으로 보내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출판기념회가 없어지자 각종 토론회가 잦아진 것도 특징이다. 한 의원의 비서 C 씨는 “선거에 앞서 의정활동을 홍보한다는 토론회가 부쩍 늘었다”며 “국회 전산망에서 두 달마다 국회 의원회관 등 장소를 예약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진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런 토론회를 통해 국민 세금으로 국회사무처에서 지급받는 입법 및 정책개발비와 자료발간비 등 4000여만 원을 ‘쌈짓돈’으로 쓰는 곳이 많다. D 비서관은 “작은 토론회는 200만 원, 큰 토론회는 700만∼800만 원이 들어간다”며 “관련 비용은 협회나 단체가 지불한 뒤 영수증을 의원실에 갖다 주면 의원실에서 국회사무처에서 제출해 회계 처리하는 식”이라고 털어놨다. 10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는 이 같은 갑질의 수단으로 악용된다. E 보좌관은 “정무위 소속 한 여당 의원은 증인을 17명 신청해놓고 회사 관계자 불렀다가 5, 6번을 바꾸더라”라며 “후원금이나 지역구 민원을 얘기하고 들어주면 증인에서 빼주는 식으로 거래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같은 현상이 더해진 것은 후원금액이 감소한 것과 무관치 않다. 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방선거를 치른 지난해 의원 후원회의 총 모금액은 504억여 원. 1인당 3억 원까지 모금이 가능했지만 선거가 없던 2013년 381억여 원에 비해 증가 폭은 작았다. 특히 비례대표 의원은 2013년 평균 후원금액이 9550만 원이었지만 이듬해는 9113만 원으로 오히려 모금이 줄었다. 총선을 치른 2012년 후원금 한도액을 넘긴 의원은 23명이었지만 지난해는 9명에 불과했다.

○ 논란 낳은 입법 로비 수사

입법 로비 수사는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경찰은 한전KDN 임직원 100여 명으로부터 1816만 원의 ‘쪼개기’ 후원금을 받고 한전KDN에 유리한 방향으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을 재개정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4월 새정치민주연합 전순옥 의원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전 의원은 “한전KDN 노조원들이 회사를 대기업으로 분류한 법안 때문에 실업자가 되게 생겼다고 호소해 법 개정안을 냈다”고 해명했다. 이어 “의원 4명이 똑같이 쪼개기 후원금을 1000여만 원씩 받았는데 그들의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 대상이 아니고 나만 수사 대상이 됐다”고 억울해했다.

입법 로비 수사가 국회의 의견 수렴 기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F 보좌관은 “국회의원 업무 중 하나가 약자나 이익단체의 의견을 듣고 정책화하는 것”이라며 “입법 로비 수사 이후 이익단체가 요구하는 정책과 방향에 대해 더 면밀하게 보게 되고 아무 이익단체나 만나기가 꺼려진다”고 지적했다.

최근 검찰이 도로교통법 개정안 발의와 관련해 야당 중진 의원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야당 의원들은 표적 수사로 여기는 분위기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쪼개기 후원금은 노조나 군소 단체 등과 가까운 야당 의원들이 많이 써온 모금 방식이어서 새누리당 의원이 쪼개기 후원금 수사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입법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이어지면서 다수의 정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도입된 후원금 제도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황형준 constant25@donga.com·강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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