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北도발 대응해 온 전작권 최적 방어체제… 전환시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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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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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다 해임된 싱글로브 前 주한미군 참모장

17일 만난 존 싱글로브 예비역 육군 소장. 한미동맹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있는 그는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주한미군 참모장 직을 걸고 미군 철수를 반대했던 용기 있는 군인이었다.
17일 만난 존 싱글로브 예비역 육군 소장. 한미동맹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있는 그는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주한미군 참모장 직을 걸고 미군 철수를 반대했던 용기 있는 군인이었다.
해임 당시 상황은
北 전력보강 혈안인데도 카터 ‘철군 검토’ 지시
“절대 불가” 맞서다 소환


17일 미국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 트루먼 도서관에서 한국을 사랑하는 노병(老兵) 존 싱글로브 예비역 육군소장(89)을 만났다.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온 싱글로브 전 소장은 40여 년간 현역으로 근무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에 모두 참전한 전형적인 야전군인이었다. 특히 주한미군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건강을 자랑하는 그는 30분간의 인터뷰 내내 힘이 넘치고 확신에 찬 어조로 한미동맹의 미래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천안함 폭침사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군 발언이 나온 배경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결정되기 전부터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주한미군 철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하지만 조지아 주지사였던 그의 판단은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한 말이었다. 당시 북한은 포병부대를 3배로 늘리고 탱크 수를 2배 증강하는 등 전력 보강에 혈안이 돼 있었다. 리처드 스틸웰 당시 주한미군사령관과 나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당선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한 뒤 카터 대통령이 합동참모본부에 내린 지시는 △즉각 철군 △2, 3년 내 철군 △5년 내 철군 중 어느 것이 타당한지를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백악관은 이 사안을 진행하면서도 펜타곤을 통해 대통령이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해 진상을 알아보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1977년 5월 당시 합참의장인 조지 브라운 대장, 필립 하비브 국무부 부장관 등 대표단이 한국에 오는 등 긴박한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철군을 정면으로 반박했다는데….

“워싱턴포스트의 도쿄 특파원인 존 사르 기자가 내게 왔다. 원래 그는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당시 주한미군 공보팀은 그 기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을 경우 엉뚱한 기사가 나갈 수도 있다며 내게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는 내 실명을 인용해 기사를 썼고 1면에 실린 기사는 주한미군 철군 감행 시 한반도에서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상황은….

“카터 대통령은 노발대발했고 국방장관을 통해 즉각 소환명령을 내렸다. 당일 저녁 워싱턴에 도착한 나는 국방장관, 육군장관과 만났고 그들은 워싱턴포스트의 인용이 잘못됐다고 말하면 큰 문제없이 지나갈 것이라고 조언했다. 난 단호히 거부했다. 보도는 정확했고 주한미군 철수는 절대불가라는 것이 내 신념이라는 말을 대통령에게 분명히 했다. 대통령 면담 직후 상하원에서 열린 청문회에서도 북한의 군사적 도발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하고 현재는 주한미군 철군을 논할 시기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결과는….

“주한미군 참모장 직에서 즉각 해임돼 조지아 주로 전보 조치됐다. 이듬해인 1978년 국방장관에게 사직서를 내고 조기전역을 요청해 소장으로 전역했다. 흥미로운 것은 카터 대통령의 참모 중 누구도 주한미군 철수를 조언한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왜 카터 대통령이 철군을 고집했는지는 미스터리다.”

판문점 도끼만행땐
사령관 - 부사령관 부재중 美본토 폭격기 출격 지시
김일성, 위기감에 결국 사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도 직접 목도했는데….

“1976년 8월 사건 당시 참모장이었다. 스틸웰 사령관이 일본에 가 있고 부사령관 역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 남부를 순찰하느라 부재중이어서 내가 상황을 지휘했다. 나는 즉각 일본의 오키나와 기지 그리고 필리핀 공군기지에 있는 전투기를 불러들였고 아이다호 주에서 폭격기를 출발시켜 공중에서 5번의 급유를 하면서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대구 비행장에 도착시켰다. 포대와 미사일도 전진 배치하는 등 일전불사 태세를 갖췄다. 김일성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도끼만행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핫이슈인데….

“지금은 전작권 전환 시점이 아니다. 한미연합사령부(CFC)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고안된 체제다. 이후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각종 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갈고닦아 온 체제이며 현 상황에서는 유사시 한반도를 가장 이상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재고해야 한다.”

―천안함 사태에서 배울 교훈은….

“북한은 한국과 미국의 대응을 보면서 약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명백한 전쟁행위를 목도하고도 별다른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했고 유엔에서의 제재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외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디펜던스(미주리 주)=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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