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100년 앙금 털까, 상처만 덧날까

  • 입력 2009년 9월 17일 02시 53분


■ 내년 日王방한 성사되면… 기대반 우려반
日王, 전향적 자세 보일땐
미래지향적 관계정립 단초
과격시위 등 우발 상황땐
양국 정권에 정치적 타격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제안한 대로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내년에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방한이 성사된다면 한일 양국의 과거사를 정리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할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왕 방한 때 과격시위 등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일본으로서도 일왕 방한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성사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전망이 많다.

○ 일왕 방한의 득과 실

아키히토 일왕은 한일관계와 관련해 비교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68회 생일 기자회견에서 일왕의 모계 혈통이 백제계라고 밝히기도 했던 그는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에 반성의 목소리를 내곤 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혀왔다.

그런 일왕이 새로운 민주당 정권 출범 이후 형성된 한일 우호 분위기에 부응해 한국을 방문하고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는 계기를 만들어낸다면 한일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 정부에도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명분을 갖춰 청산할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일왕 방한에 대한 한국 사회 일각의 강한 반발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대규모 항의 시위나 테러 기도 등의 불상사가 발생한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양국 모두 국내 정치적 부담도 크다. 그동안 역사교과서나 독도문제 등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지는 과거사 현안은 역대 한국 정부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일본 정부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정부가 일왕 방한 문제를 잘못 다뤘다가 다른 개혁을 추진할 동력을 상실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인 참정권 문제나 과거사 문제 해결에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가능성마저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다.

○ “공은 일본 쪽으로”

일왕 방한 문제는 한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오랜 과제 중 하나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이래 역대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일왕의 방한을 제안했다. 그러나 한국 국민정서나 일본 정부의 우려로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낮은 가운데 한국 정부가 일본 측에 내세운 호의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던 셈이다. 일본 정부는 매번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해왔다.

따라서 이 대통령의 일왕 초청은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도 볼 수 있다. 정부의 고위 외교소식통은 “한국 정부는 국민들이 일왕을 맞이할 만큼 성숙되어 있으니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측이 과감한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측에 일왕 방한 문제에 대해 결정하라고 공을 넘긴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일왕 방한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민주당 정권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기를 잡아야 롱런할 수 있다. 따라서 일왕 방한 문제가 갖는 정치적 민감성을 감안할 때 일본 정부가 외교적 모험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민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다면 자신감을 갖고 일왕 방한을 본격적으로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과거청산의 보증수표라는 느낌 줘선 안돼”
■ 한일관계 전문가 분석
“사과 수준-행동이 중요
무리하게 추진 땐 역효과”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방한 제안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일 양국의 공감대 없는 무리한 방한 추진은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방한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에 대한 일왕의 사과 수준과 이에 대한 한일 양국민의 반응에 따라 한일관계가 되레 갈등적 퇴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①구체적 사과-반성 없는 방한 무의미

무엇보다 전문가들은 일왕이 일본 국민을 대표해 과거사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성명이나 공식 발언을 하지 않으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일왕이 방한해 일제강점 등 역사 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사과와 반성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일왕의 일정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1970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것처럼 일왕이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경기 남양주시)을 참배하거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생활하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을 찾는 방안을 거론했다.

②과거사 청산 보증수표로 요구하면?

김호섭 중앙대 공공정책학부 교수는 “일본이 일왕의 방한을 한일의 모든 과거사가 일거에 청산됐다는 ‘보증수표’로 인식할 경우 한일관계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1992년 중-일 수교 20주년을 맞아 아키히토 일왕이 중국을 방문해 사죄했지만 현재의 중-일관계가 좋다고 볼 수 없다”며 “일왕 방문으로 과거사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순진한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국민의 반일감정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는 일왕의 사과 내용과 관계없이 방한 자체가 진정성 없는 이벤트로 여겨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만일 일왕이 계란 세례를 받는 일 등이 생길 경우 일본의 극우세력을 자극해 한일관계를 훼손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③일본 국민 공감대부터 형성돼야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라는 2010년의 상징성에 얽매인 나머지 한국의 외교적 압력으로 일왕이 오는 모양새가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피해자는 한국인 만큼 일왕의 방한은 일본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형태가 되어야지 한국이 요구하는 것으로는 응어리를 풀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 문제에 전향적인 일본 민주당이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아직 일본 국민들 사이에 일왕 방한에 대한 동의가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왕이 현재 고령(76세)이고 한일 간 화해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해도 일본 국민의 자발적인 공감대가 먼저 형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대체할 추도시설을 만들거나 재일동포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공감대가 성숙되는 과정에서 일왕 방한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日 궁내청 “정부가 우선 검토할 일” 부담 드러내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방한 언급에 대해 일본에서는 아직 공식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일왕의 대외창구 역할을 하는 궁내청이 “방한은 정부가 우선 검토할 일”이라며 원론적인 얘기만 했을 뿐이다. 16일은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는 날이기 때문에 일본 언론들도 일왕의 방한 관련 이슈는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여론은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에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응이 많은 편이다.

우선 일왕 방한 시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이라는 역사적으로 민감한 시점에 일왕이 방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한국 내에서 일왕 방문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일본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일왕의 방문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또 북핵 실험 등으로 북-일 관계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에서 쏟아져 나올 비난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또 이 대통령은 한일 양국 관계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자는 뜻에서 방한을 바라고 있지만 일왕의 방문 이후 결과를 걱정하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 학계의 한 교수는 “일본 정부는 향후 두 나라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100% 확신이 없는 한 일왕의 방문을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일본 사람들은 일왕의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일본인 교수는 “일왕의 해외 방문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갖고 미리 준비해 이뤄진다”면서 “역사적으로 민감한 한국 방문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진심 어린 뉘우침이 먼저”
■ 시민단체 반응
“日 새 정권 출범에 맞춰 과거사 사과 우선돼야”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언론을 통해 일본 아키히토 일왕이 내년에 방한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해 보수단체들은 일왕 방한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정립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나타내면서도 과거사에 대한 사과 등이 우선돼야 한다는 견해를 보였다.

뉴라이트전국연합 김진수 대변인은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한일 양국의 관계가 지금까지 과거사 문제와 역사 왜곡 등으로 발목이 잡힌 현재의 상황에서 일왕의 한국 방문이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면서도 “일왕의 방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국에 피해를 준 데 대해 통렬한 사과를 동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우호적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 출범이라는 맥락에서 일왕의 방한을 양국 관계 재정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한국자유총연맹 박창달 총재는 “새로 출범한 일본 민주당 정권이 아시아 중시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내년에 이루어질 일왕의 방한이 파격적인 반성과 사과를 통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진보연합 최진학 공동대표는 “새로운 한일관계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질 일왕의 방한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면서도 “두 나라 사이의 정리되지 않은 아픈 과거사에 대한 문제를 풀어가려는 일본의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광복회는 “공식 논평할 단계는 아니지만 순국선열과 독립유공자, 일본군위안부 등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와 뉘우침의 표명이 없이 이뤄지는 일왕의 방한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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