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나라 당…‘박근혜 거부권’이 ‘李대통령집행권’보다 세다?

  • 입력 2009년 5월 12일 03시 03분


돌아온 朴… 다음 시간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1일 오후 미국 방문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천=박영대 기자
돌아온 朴… 다음 시간표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1일 오후 미국 방문을 마치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공항 귀빈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인천=박영대 기자
親朴 “입으로만 동반자냐”… 親李 “고비때마다 비협조”

《최근 여의도 정가에서는 ‘박근혜의 거부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모든 정책의 의사결정권과 집행권을 갖고 있음에도 현실 정치에선 박근혜 전 대표의 반대에 부닥쳐 국정 운영의 동력을 잃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정국 수습책으로 내놓았던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가 박 전 대표의 말 한마디로 물거품이 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한나라당 의원 170명 중 박 전 대표를 지지하는 ‘친박’계는 60명이 채 안 된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쟁점법안 처리와 4·29 재·보선 등의 주요 현안에 대해 간명한 반대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친이’계의 정국 구상에 제동을 걸었다. 이런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으면 여권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야권의 반대보다 여권 내부의 균열이 더 문제다. 그럼에도 친이와 친박 진영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며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그로 인한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 ‘한나라당이 아니라 두 나라 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격화된 양측의 불협화음은 어디에서 비롯됐고 과연 화합은 어려운 것인지를 살펴본다.》

■ 친이를 왜 불신하나

“급하면 박근혜 들먹이지만 공천-인사 등 철저히 배제”

당 일각 “차기보장이 해법”

올해 초 개각을 앞두고 한나라당 친박계 의원 몇 명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술잔이 몇 차례 돌자 A 의원은 “이명박이 박근혜 보고 동반자라고 했나. 거짓말쟁이 같으니…”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어 “단 한 번이라도 박근혜를 동반자 대접해 줬나. 급하면 박근혜 이름을 들먹이고… 장관 자리 받아먹는 × 있으면 내가 가만히 안 있는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발표된 개각 명단에 박 전 대표 측으로 분류되는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많은 친박계 의원은 이 대통령의 ‘동반자 약속’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한 친박계 의원은 “내각과 정부 산하기관 인사에서 친박계가 철저히 배제된 상황에서 ‘동반자’라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잔인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1997년 대선 때 ‘DJP 연합’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김종필 총리 내각이 출범한 것을 거론하며 이 대통령의 ‘약속 파기’를 거론하는 의원도 많다.

박 전 대표 측이 이 대통령을 불신하게 된 것은 지난해 총선 공천파동이 결정적이었다. 청와대의 뜻을 받든 이방호 사무총장과 이재오 전 의원 측이 공천을 좌우했고 이 과정에서 친박계 의원이 무더기로 낙천됐다고 친박 측은 입을 모은다. 특히 박 전 대표는 자신이 당 대표 시절 만들어 놓은 투명한 공천시스템이 몇몇 권력 실세에 의해 망가졌다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공천 결과를 놓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공당(公黨)의 사당화(私黨化)’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는 것이 친박계 의원들의 얘기다.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가 무산된 것에 대해서도 친박계 의원들은 “박 전 대표와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먼저 언론에 흘린 것은 화합의 진정성이 없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박 전 대표 측은 또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친이 진영의 비판에 대해서도 “우리가 안 도와준 게 아니라 친이 쪽이 ‘속도전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게 문제”라고 반박한다.

박 전 대표의 재·보선 지원 문제에 대해서도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투명 공천이 됐다면 경주 시민이 거부한 정종복 전 의원을 다시 공천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친박 성향의 이성헌 제1사무부총장은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재·보선 공천 과정에서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보고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며 “안경률 사무총장이 밖에서 갖고 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밀어붙였다”고 주장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에게 차기 대선과 관련해 어떤 보장도 해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가 적지 않다. 공동 정권이라면 박 전 대표가 국정운영의 경험을 쌓으며 차기 대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하는데 이 대통령 측에선 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측근인 김재원 전 의원은 “박 전 대표는 ‘차기 보장’을 요구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자신이 대표시절 만들어 놓은 정당 운영의 틀이 친이 측에 의해 무너졌다고 보고 이를 되살리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 친박에 왜 불만인가

“도움 청하면 ‘원칙 아니다’,손 내밀면 ‘진정성 없다’ 외면

野보다 상대하기 어려워”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중진 의원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한 2월 2일. 청와대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57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마련해 분위기를 돋웠다. 당-청 회동 자리였지만 청와대에선 생일을 맞은 박 전 대표 축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대통령은 “중진들이 힘을 모아주면 정부가 열심히 하겠다”며 2월 임시국회에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냉랭했다. 그는 “쟁점 법안일수록 먼저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에게 “협조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오히려 속도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친이계에선 박 전 대표가 늘 이런 식이라고 불평한다. 이쪽에서 손을 내밀면 “진정성이 없다”고 뿌리치고 도움을 청하면 “원칙이 아니다”면서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가 미국에서 “소위 친박계라는 분들이 당이 하는 일에 발목을 잡은 게 뭐가 있느냐”고 했지만 친이계 생각은 다르다. 지난해 쇠고기 파동과 입법 전쟁 등 고비마다 친박계는 야당에 필적하는 반대 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촛불집회로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던 작년 5월,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국민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이 이념 문제는 아니다”라며 정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올 1월에는 “한나라당 법안들이 국민에게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해 법안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작년 9월 정부로선 한시가 시급했던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을 때 친박계 의원 상당수가 불참했다. 당시 친박계인 유승민 의원은 “추경안에 반대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한목소리를 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반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친이계의 친박 불신은 4·29 재·보선을 거치면서 더욱 고조되고 있다. 친이-친박 진영 간 대리전이 된 경북 경주 선거 때 친박계 의원들은 경주에 아예 발길을 끊었다. 친박계는 “친박계 후보를 돕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하지만 친이계에선 “한나라당 의원이라면 마땅히 한나라당 후보 지원에 나섰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나 몰라라’ 하는 친박계의 태도를 꼬집었다. 수도권의 친이계 재선 의원은 “친박계가 이럴 때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 그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BBK 의혹과 대운하 검증 공세 같은 어두운 생각이 짓누른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BBK 문제만 하더라도 특검 결과 허위로 밝혀졌지만 이후에 일언반구도 없었다”면서 “야당보다 더 심하게 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한 친이 직계 의원은 “친박계는 한쪽으로는 원칙을 얘기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우리한테도 자리를 좀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친이계가 박 전 대표를 버릴 수도 없는 처지다. 지난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텃밭인 영남권 68석 중 22석을 친박연대와 친박계 무소속 후보 등에게 내줬다. 영남은 이 대통령의 고향이지만 대선후보 경선 때도 박 전 대표에게 졌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 중립 의원-당 원로들에 들어보니…

“비주류에 당직 한두개 준다고 화합되나”

“朴, 국정운영-선거에 뒷짐만 져선 안돼”

한나라당 내 어느 계파에도 치우쳐 있지 않은 인사들은 친이-친박 진영 갈등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중립 성향의 의원들은 최근 계파갈등이 눈 감고 넘길 수 없는 상황에 왔다는 데 공감하고 “이번 사태가 친이-친박 진영 갈등 문제를 풀 마지막 기회”라고 입을 모았다. 3선의 이주영 의원은 ‘박근혜 총리 카드’를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은 외교·대북관계·산업구조 재편과 같은 국정의 큰 그림만 그리고 나머지는 박 전 대표에게 총리직을 맡겨야 한다”며 “이를 통해 국정을 함께 책임지는 동반자 관계를 세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권영세 의원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해 친이·친박을 넘어선 새로운 지도세력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의원은 “계파색이 약한 지도부가 친박계를 건전한 비판 세력으로 이끌어 내 주류와 비주류가 서로 견제하는 구도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재선의 강재섭계인 이종구 의원은 “현실적인 영향력이 강한 박 전 대표가 국정 운영이나 선거에서 뒷짐을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친박 진영은 당내외 친박 조직을 없애고 당 조직을 결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1정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장윤석 의원은 “여야가 협상으로 주고받기가 이뤄지는 것처럼 당내 주류-비주류 간에도 물밑 접촉을 통한 주고받기 협상이 필요하다”며 “양측에서 대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 서로의 진의를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구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은 “비주류에 당직 하나 둘 내주는 것으로 화합이 될 수 없다. 청와대가 국회와의 소통 노력이 있다면 의원들은 계파를 떠나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게 돼 갈등이 봉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1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친이 친박 양쪽 다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라며 “지금 지도부를 바꾸거나 어떤 화합책을 들고 나와도 결국 계파 간 갈등을 키우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 원로들로 구성된 상임고문단은 8일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박 대표와 오찬을 함께하며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만나 당 화합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날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만남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박 대표밖에 없다. 박 대표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현 지도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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