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분간 질문만 50여개… ‘속사포 성토’

  • 입력 2008년 1월 29일 02시 59분


“물러나는 대통령 철학-가치 모두 훼손

인수위 때문에 ‘식물 대통령’ 돼버렸다”

“정부조직 개편의 논거가 무엇이지요?” “우리 정부가 큰 정부입니까?” “위원회 적은 나라가 선진국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28일 긴급 기자회견은 “인수위(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는 말처럼 질문으로 시작됐다. 45분간 긴급 기자회견과 일문일답을 하는 동안 50개가 넘는 질문이 쉴 새 없이, 격정적으로 던져졌다. 그는 “인수위가 부처 공무원들에게 현 정부가 한 정책의 평가를 요구하고, 새 정부의 정책을 보고하라고 지시, 명령하는 바람에 현직 대통령은 이미 ‘식물 대통령’이 돼 버렸다”는 말도 했다.

노 대통령은 직접 작성한 장문의 기자회견문을 통해 통폐합 대상 부처가 왜 없어지면 안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노 대통령은 “어떤 것이 데드라인이냐. 어느 정도면 수용하고 거부할 것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면서도 껍데기와 알맹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눈길을 끌었다. 정부조직법 개편안의 국회 심의 과정을 염두에 둔 듯 “서로들 체면을 살려야 하니까 껍데기는 변해도 알맹이는 살아나는 수도 있지 않겠느냐. 껍데기가 없으면 알맹이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구조가 있다”고 한 것.

이런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기획예산처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대한 여러 언급을 해 두 부처의 존속 여부가 거부권 행사 여부의 기준이 될 것이란 분석을 낳았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최대 쟁점인 통일부 존폐 문제에 대해서는 “통일부는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많으니 지켜지겠지요”라고 낙관했다.

노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 예고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거부권 시사가 국회 심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자연스러운 정치 과정이다”며 ‘국회 압박용’임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인기 없는 대통령이어서 당연한 것을 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언론과 정치권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음은 발언 요지.

▽‘참여정부 철학과 가치 허물 수 없어’=참여정부가 공을 들여 만들고 가꾸어 온 철학과 가치를 허물고 부수는 것이라면, (법안에) 서명하는 것은 참여정부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바꾸는 일에 동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물러나는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를 다 두드려 훼손시키는, 파괴하는 그런 법안에 서명하라는 나라가 어디 있나. 참여정부의 철학을 형편없이 깎아내리는, 참여정부의 철학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법안에까지 꼭 서명을 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협력인가.

▽‘선거는 끝났다’=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거 분위기, 이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선거는 끝났다. 냉정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해야지 분위기에 휩쓸려서 이것도 백지 위임, 저것도 백지 위임…. 나중에 보고 이상하게 됐다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도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지난 5년 동안 백지 위임한 것 있나. 국회에서 이유 없다고 하면, 대통령이 못 받아들이면 시간 조금 더 걸리면 되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를 경제 논리 앞에서 지켜내야’=예산처 독립 이후 문화, 환경, 노동, 인권, 복지 예산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경제 분야 예산을 넘어섰다. 예산 기능이 경제부처로 들어가면 예산 구조가 어떻게 변화할까. 경제부처는 경제계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부처는 시민적 권리를 대변한다. 부처 간 협의를 해보면 언제나 경제부처의 목소리가 사회부처보다 컸고 이는 좌파라는 소리를 듣는 참여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사회부처 예산이 계속 증액돼 온 것은 예산 기능이 경제부처로부터 독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 환경, 노동, 인권 등의 사회적 가치를 경제논리 앞에서 지켜내는 것이 독립된 예산처의 가치다.

▽‘균형발전위엔 참여정부 핵심 가치 담겨’=균형발전위에는 참여정부의 핵심 가치가 담겨 있다. 균형발전은 국가적으로 합의한 것 아니냐. 기둥뿌리 뽑아버리고 지붕만 남겨놓으면, 껍데기만 남겨놓으면 균형발전 되겠느냐. 균형발전위는 여러 지역과 분야의 사람이 모여 균형발전특별회계 사업을 심의 조정하고 예산을 배분한다. 모든 부처에 다 걸리는 일인데 균형발전위를 없애고 나면 균형발전정책은 사실상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인수위 “아름답게 퇴장하길” 한나라 “어린아이처럼 억지”▼

신당 “대통령 지적, 국민생각과 다르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나서자 인수위와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 특유의 오만과 독선”이라고 비판했다.

인수위 이동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군살을 빼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조직을 융합함으로써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변인은 이어 “참여정부 들어 공무원 6만5000여 명, 각종 위원회 52개, 국가부채가 170조 원이나 늘었다”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아름답게 퇴장하는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인은 노 대통령의 회견을 보고받고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주호영 당선인 대변인이 전했다. 한나라당도 이날 성명을 통해 “노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정권교체 때마다 가치와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권 인계인수 작업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며 “퇴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대통령이 어린아이 같은 억지를 부리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박경모 기자


▲ 영상제공 : 인수위 편집 : 동아일보 사진부 이종승 기자

한나라당은 또 “지난 대선에서 532만 표 차가 주는 의미는 노 대통령이 차기 정부의 정권 인계인수에 적극 협조하라는 뜻”이라며 “자신의 철학과 새 정부의 개편안이 다르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역사성과 연속성을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대통합민주신당은 논평을 통해 “대통령의 (여러) 지적은 국민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공감을 표했다.

민주당은 “여성가족부 폐지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면서도 “개편안 논의가 막 국회에서 시작된 시점에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거부 방침을 나타낸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밝혔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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