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핵화 의지 명시 않고 “평화체제 논의” 직행

  • 입력 2007년 10월 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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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 나눌까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다. 평양=연합뉴스
무슨 이야기 나눌까 4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다. 평양=연합뉴스
4《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 구축 필요성에 공감하며 이를 위해 3자 또는 4자 정상의 종전선언을 추진한다.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의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최우선 과제인 북핵 문제에 관한 남북 정상의 합의는 미흡한 수준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의 지적이다. 최소한 ‘2007 남북 정상선언’에 나타난 문구에는 핵문제 해결의 적극적인 의지가 읽히지 않는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상징적 수준의 언급만 했기 때문이다. 원론적인 차원에서의 비핵화 의지조차 밝히지 않은 채 현재 진행 중인 6자회담에 맡긴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4일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귀환한 뒤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가진 보고회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최고지도자로서 북핵 폐기의 분명한 의지를 밝힌 만큼 이행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쉽게 말해 핵 폐기는 하는데 6자회담에서 하자는 식으로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전후가 바뀌었다”=이번 남북 정상선언 4항의 논리구조는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간다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 회담의 합의문이 이행되도록 노력한다고 돼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정도의 언급도 없다. 2005년 6월 김 위원장이 대통령 특사로 방북했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유효하며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이라고 밝힌 것에 비해서도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그럼에도 남북은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한반도 지역에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만나 종전 선언을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이는 전형적인 본말전도의 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남북이 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틀’이라고 합의한 6자회담에서도 평화체제의 논의는 북한 핵이 폐쇄·봉인과 불능화 단계를 거쳐 궁극적인 핵 폐기 과정에 접어들 때 비로소 평화체제 논의가 본격화한다고 밝히고 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 비핵화 의지를 읽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기기를 기대했는데 그 부분의 논의가 부족하다”며 “이번 선언의 우선순위도 평화체제 언급이 먼저 나오고 핵 문제가 나온 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

▽6자회담에선 북핵 폐기 후 평화체제 논의=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초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핵 프로그램을 검증 가능하도록 폐기한다면 한국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말해 핵 폐기가 평화 논의의 전제임을 분명히 했다.

김태효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에 이어 군사적 신뢰구축 단계를 거쳐 진행시켜야 할 평화체제 구축을 아무런 방법론 제시 없이 선언한 것은 스스로 실현 가능성이 결여돼 있음을 증명한 셈”이라며 “공허한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도중에 김 위원장이 6자회담 북한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회담장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 “10월 3일 (6자 회담) 합의 경과를 보고토록 해 소상한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종전선언 당사국 지위를 공인받기는 했지만…=‘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선언을 한다는 대목은 그나마 남측이 종전선언의 당사자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동안 학계 및 국제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종전선언의 주체를 놓고 전쟁 당사국 또는 유엔군 참전국까지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해석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의 서명자는 아니지만 6·25전쟁의 실질적 당사자인 남북한의 정상이 종전선언의 주체를 남북한과 미국 또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으로 압축해 사실상 주체 논란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노 대통령은 도라산 보고회에서 “김 위원장에게 부시 미국 대통령이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에서) 제안한 종전선언 방안을 설명했고, 김 위원장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한편 종전선언의 주체를 ‘3자 또는 4자’로 명시한 것은 정전협정의 당사자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고 있는 중국은 평화체제 협상의 당사국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북한 견해가 반영됐을 개연성이 있으며 논란의 불씨가 될 가능성이 있다.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 협상의 당사자가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라는 공감대가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중국을 배제한 3자간 협상을 주장할 경우 중국의 반발이 예상된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5《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확대 발전시키고 ‘서해 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설정 등을 적극 추진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남북 경제의 ‘동반 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개성공단에 대한 자유로운 출입과 경의선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남북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북한의 군사적 보장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뒀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4일 정상회담 보고회에서 “남북 경협과 관련된 여러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해서 부총리급인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를 운영하기로 했다”며 “실무선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새로운 사업의 제안과 합의를 이뤄 나가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번 정상선언이 남북 경협을 지속적인 쌍방향 투자 협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내비쳤다.

하지만 ‘쌍방향 투자’와 ‘남북한 상호 이익 추구’라는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이번 선언에 포함된 남북 경협 방안은 대북 지원과 투자에 집중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안변과 남포에 조선(造船)협력단지를 건설하는 방안이나 농업 보건의료 등에 대한 협력, 개성공단 확대 및 철도와 도로 개보수 문제 모두 남한의 전폭적인 투자를 전제로 한 것이다. 정부는 경의선 철도 보수에 2900억 원, 개성∼평양 고속도로 재포장에 최대 4400억 원이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북 투자 비용은 모두 국민과 남한 기업의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논란이 예상된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평화협정::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나라나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평화상태를 회복하거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맺는 협정. 정전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인 절차다. 6자회담 ‘9·19 공동성명’(2005년)에서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별도의 포럼’에서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키로 했다.

::정전협정::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서명함으로써 체결된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작성됐다. 이 협정으로 남북 간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고 6·25전쟁이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국제법적으로는 지금도 정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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