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고진화 의원 경선후보 등록

  • 입력 2007년 6월 13일 03시 01분


코멘트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왼쪽 사진)과 고진화 의원이 12일 당내 대선후보 경선 등록을 마친 뒤 지지자들 앞에서 출마 선언을 했다. 이훈구  기자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왼쪽 사진)과 고진화 의원이 12일 당내 대선후보 경선 등록을 마친 뒤 지지자들 앞에서 출마 선언을 했다. 이훈구 기자
《한나라당 원희룡(43) 고진화(44) 의원이 12일 경선 후보로 등록하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원 의원은 이날 서울 강서구 염창동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이 아닌 이번에 반드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랑을 헤쳐 온 지혜와 용기를 바탕으로 지식정보화와 세계화를 선도하겠다”고 말했다. 고 의원도 당사에서 출마 회견을 열고 “이번 대선은 미래로 나아가느냐, 과거의 영광에 머무느냐를 결정하는 갈림길”이라며 “한나라당에서 유일한 민주 개혁주자로서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승리를 쟁취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 원희룡 후보는…한나라 소장파 대표주자

원희룡 의원은 ‘학력고사 전국 수석’ ‘서울대 수석 입학’ ‘사법시험 수석’ 등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1964년 제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 탓에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받지 못해 발가락 두 개가 위로 향해 뒤틀린 기형이 됐다. 이 때문에 군대도 면제받았다.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에 투신해 서울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하고 인천의 금속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기도 했다. 이 시절 동갑내기 부인 강윤형 씨를 만나 10년 넘는 사귐 끝에 결혼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운동권 생활을 그만둔 그는 사시 준비 2년 만에 1992년 수석으로 합격했다. 2000년 16대 총선 직전 ‘젊은 피’ 수혈 바람을 타고 정계에 입문한 그는 김부겸 김영춘 등 당시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미래연대를 만들어 당 개혁을 주장했다.

17대 총선 이후에는 소장파 의원모임인 ‘새정치수요모임’ 대표 격으로 2004년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해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최연소’ 최고위원이 됐다. 2006년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 전 대표, 손학규 전 경기지사 ‘3강’ 구도로는 정권교체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며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 고진화 후보는…黨개혁 주창 ‘아웃사이더’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5년 5월 대학생 70여 명이 서울 을지로 미국문화원을 점거해 “광주학살 지원한 미국은 사죄하라”며 농성을 벌였다. 이 사건을 주도했던 성균관대 4학년생 고진화 삼민투 위원장은 5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을 복역했다.

강원 영월군 출신의 고 의원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교사였던 아버지를 갑작스레 잃고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고교 2학년이던 1980년 5월 울먹이며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려 주던 김진경 담임교사를 통해 역사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 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교육문화비서관을 지냈다.

고 의원은 성균관대 사회학과 82학번으로 입학해 총학생회장, 삼민투 공동위원장으로 독재정권에 맞섰다. 그는 ‘3김’ 청산을 내세워 통합민주당에 합류하면서 제도권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6년 총선에서 서울 강서을 후보로 출마해 고배를 마신 뒤 2000년 오경훈 씨 등 다른 386세대와 함께 한나라당으로 옮겼다.

고 의원은 “원칙과 소신으로 한나라당을 개혁하고 싶었다. 호랑이를 잡으러 보수의 심장에 뛰어들었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의 ‘아웃사이더’ ‘이단아’ 등의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고 의원은 미혼이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