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신년연설 “10시간만 주면…” 원고 건너뛰며 연설

  • 입력 2007년 1월 24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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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신년특별연설을 통해 올해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를 비롯한 국정 전반에 걸쳐 참여정부의 성과를 강조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이 23일 신년특별연설을 통해 올해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경제와 외교안보 분야를 비롯한 국정 전반에 걸쳐 참여정부의 성과를 강조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신년 특별연설에서 “시간 조절을 잘 못했다”고 토로할 정도로 시종 시간에 쫓겼다. 이날 연설을 앞두고 청와대가 사전에 배포한 원고는 200자 원고지 220장 분량으로 무려 4만4000자에 달한다.

그러나 제한된 1시간에 소화하기엔 너무 많은 양이어서 실제 원고의 대부분을 건너뛰었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연설이 끝난 뒤 “배포한 원고를 대통령의 발언으로 해 달라”고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10시간만 주면…”=노 대통령은 “경제동반성장 균형발전 일자리 비정규직 부동산교육 하나하나가 전략 과제거든요. 말씀드려야 하는데 시간이 40분 지났다. 얘기할 시간이 없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 대통령은 “도올 김용옥 선생 강의는 엄청 부럽다. 10시간만 주면, 일주일에 한 시간 씩 10주간…. 제가 말을 잘 해서 그런 게 아니고 국민에게 전달할 말이 많아서…”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또 자신의 ‘거친 발언’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골병이란 말은 써도 되죠. 꿀릴 것 없다고 했더니 신문이 나무라기에…” “참여정부가 투자를 좀 한 것처럼 말씀드렸는데, 새 발의 피다. 새 발의 피 괜찮죠? 불안해서…”라며 표현에 신경을 썼다.

▽‘야당 탓’=노 대통령의 연설 중 ‘자화자찬’과 ‘남의 탓’이 많았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것도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겠다”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등의 원론적인 발언이었으나 앞뒤 문맥을 들여다보면 역시 야당과 언론 등 ‘남의 탓’으로 넘겼다.

노 대통령은 민생 문제와 관련해 “책임 없다고 말하면 국민이 매우 섭섭하겠죠. 책임 있다. 회피하지 않겠다”며 실패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곧바로 “민생문제 풀지 못한 책임은 있지만 ‘만들어 낸’, ‘초래한’ 책임은 참여정부가 몽땅 다 질수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스스로 외환위기 초래한 사람이 지금 저에게 민생 파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책임지라고 이야기하니까 불만”이라며 “‘적반하장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다”며 한나라당을 겨냥하기도 했다.

▽‘언론 탓’=노 대통령은 연설 59분쯤에는 “시간이 얼마 남았느냐. 1분, 좋다”며 남은 시간을 언론 비판에 할애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실제 연설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언론을 공격했지만 미리 배포한 원고에서는 20여 곳에서 언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그는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 “(언론이) 반대하니까 절반밖에 못하고 절반밖에 못하니까 효과가 없었다”며 “결국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신문들이 흔들지 않았으면 더 강력한 정책 안 나왔을 텐데 너무 흔들어서 무력화시키니까 더 센 정책 나왔다. ‘부동산 신문’은 자승자박한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개헌에 대해서도 “개헌 제안 안 했으면 나중에 ‘노’가 직무를 방기했다고 무슨 무슨 신문이 쓰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미리 배포한 원고에서는 “내일 아침 일부 언론을 한 번 보라. 오늘 보고 들은 것과는 사뭇 다른 기사가 나올 것이다”고 언론에 대한 불신을 표시했으나 실제 연설 때는 말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노 대통령은 원고에서 정상회담 추진에 대해 “대통령이 될지 안 될지도 알 수 없는 차기 주자라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놓고 되느니 안 되느니 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며 차기 대선주자들을 비난했다. 여권에 유력한 대선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야당 대선주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은 또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는 “참여정부의 민생 문제는 문민정부 시절에 생겼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의 토대를 만들고 △정부 개혁을 본격화했으며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해소시켰다고 대체로 긍정 평가했다.

노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하며 “아무도 저를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탄하는 모습도 보였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남북관계

北핵실험후 안보환경 변화 외면…아무일 없었다는 듯 ‘포용’ 고수

노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핵심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이라고 강조한 뒤 평화를 위한 전략의 핵심으로 ‘공존의 지혜’를 꼽았다. 남북이 화해와 협력, 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호 믿음을 갖고 포용해야 한다는 것. 연설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미리 배포한 원고에서는 “포용은 설사 상대가 속이는 일이 있더라도 낭패를 보지 않을 힘을 가진 강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으로 180도 달라진 안보 환경을 무시한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포용정책을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보여 준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세종연구소의 송대성 수석연구위원은 “8년간의 포용정책이 평화의 증진이 아니라 한반도의 안보 불안이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상대를 적대하고 의심하고, 상대의 허물을 들추어 자존심과 불안을 자극하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해서는 신뢰가 안 생긴다. 속이 상해도 참고 신뢰를 쌓아 가자”고 한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은 “신뢰를 깬 것은 북측”이라며 “핵실험을 한 북한에 쉽게 면죄부를 주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전작권 환수

유사시 국민의 생명 보호가 핵심…한국군 능력 고려없이 ‘자주’ 고집

노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가 자주국가의 핵심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1994년 한국군이 환수한 평시작전통제권을 허울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참여정부는 남북관계와 한미동맹이라는 현재의 좁은 틀이 아니라 중-일관계의 변화를 포함한 미래의 동북아 질서를 내다보면서 현재와 미래의 안보를 조화롭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노 대통령이 북한군의 위협과 한국군의 능력을 도외시한 채 자주의 명분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군 통수권자가 군사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주권’, ‘자주’ 명분을 내세워 전시작전권 환수를 추진하는 것은 국익과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 정부에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낸 신일순 예비역 대장은 “한미연합사는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한반도 평화를 보장해 온 한미 군사동맹의 요체”라며 “한미연합사령관이 미군 장성이라고 해서 전시작전권을 일방적으로 행사해 한국군을 다 통제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개헌

5년 단임-4년 연임 장단점 있어…‘내 제안이 옳다’는 논리는 무리

노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추진을 반대한 한나라당에 대해 “국민의 지지가 높으니 오만해진 것이다. 부자 몸조심하는 모양이다. 꾸벅꾸벅 따라만 가는 것은 국회의원이 할 도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대선주자들도 개헌 의제에 관해 국민 앞에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제시한 개헌안은 반드시 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조홍석(헌법학) 경북대 교수는 “5년 단임제와 4년 연임제 중 무엇이 우월한지 정답은 없다. 또 대선과 총선 주기를 일치시킬 경우 권력 통제와 중간평가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는 “선거 주기를 일치시켰다가 대통령 유고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선거 주기를 맞추려면 대통령 1인의 사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총선과 지방선거 주기를 일치시켜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 대선 주자들은 노 대통령이 개헌을 제기하기 전에 이미 의견을 내놓았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개헌을 제기하지 않았으면) 일부 언론은 20년 만에 한 번 오는 좋은 기회에 노 정권이 직무를 방기했다고 비방할 것”이라고 했지만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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