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도 바뀐 ‘千의 논리’

  • 입력 2006년 10월 3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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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민주당 내 ‘신당파’의 핵심이었던 천정배 의원은 몇몇 기자를 만나 노무현 대통령이 신당 창당을 주저한다고 비판했다.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분당(分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원칙 없이 이 세력, 저 세력이 다 모일 바에야 신당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노 대통령이 주저하니까 신당 작업이 더디다.” 당시는 민주당의 개편 방식을 놓고 호남 중진이 중심이 된 이른바 구당(救黨)파를 포함시키느냐(통합신당), 빼느냐(개혁신당)를 둘러싸고 민주당 내부 공방이 첨예할 때였다.》

천 의원은 공사석에서 연일 분당을 통한 개혁신당 창당 불가피론을 폈다. 5월 30일 당무회의에서는 “민주당을 아무리 개혁해도 호남이란 지역구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고, 5월 1일 고위 당직자 회의에서는 “각 세력의 통합에는 단호히 반대하며 그렇게 할 바에야 신당을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여권의 한 중진 인사는 최근 “2003년 노 대통령은 분당을 통한 신당은 희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 의원 등의 고집에 등을 떠밀렸다”고 회고했다.

결국 2003년 11월 민주당 구당파는 남겨두고 이른바 개혁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분당해 나가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3년이 지난 요즘. 천 의원은 다시 신창 창당에 총대를 메고 나섰다. 하지만 예전과는 논리가 180도 다르다. 그가 말하는 신당이란 통합신당이며, 연대 1순위 대상은 민주당이다.

천 의원은 29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정권 재창출’이란 현실론을 들며 3년 전 ‘차버리고’ 나갔던 민주당에 대해 “같은 노선과 정책을 가진 정치세력이 함께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개혁이라고 생각한다”며 통합을 제안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천 의원은 22일 노 대통령을 만나 통합신당론을 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민주당과 통합은 결국 지역주의를 강화하자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천 의원은 2002년 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노무현 캠프’에 참여했던 유일한 현역 의원이다. 그의 통합신당론은 노 대통령과의 결별 선언이기도 하다.

천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던 정동영 전 의장도 과거 지역정당으로 몰아붙였던 민주당과의 통합신당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 전 의장은 13일 “열린우리당 창당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며 “민주세력의 분열이 초래된 데 책임감을 통감한다”고 창당과 분당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정 전 의장도 3년 전엔 “김대중(DJ) 전 대통령 때 호가호위하던 사람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선동하며 DJ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다”(2003년 7월), “신당은 정치 개혁이며, 민주당이 앞장서 부서질 때 그 공간에서 새로운 정치질서가 만들어진다”(2003년 5월)고 했었다.

민주당은 물론이지만, 열린우리당 사람들조차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3년 전 분당과 신당 창당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어떻게 180도 돌아서 통합신당을 외칠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한마디로 염치가 없다”며 “차라리 정계 은퇴를 선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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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 말 아끼는 ‘靑’ ▼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의 한 명인 천정배 의원까지 당 해체 주장을 펴고 있지만 청와대는 말을 아끼고 있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30일 천 의원의 창당 실패론과 통합신당 주장에 대해 “어떤 모양인지도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대응하지는 않겠지만 “불쾌하다”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실제 청와대 관계자들은 천 의원 등의 주장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진정 당이 잘못됐다면 한나라당처럼 천막당사에 가든지, 누구처럼 ‘3보1배’를 하면서 참회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지적했다. 제대로 된 참회 없이 터져 나오는 정계개편 논의는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 점에서 청와대는 여당발 정계개편 논의가 당분간 동력을 갖기 힘들 것으로 보는 듯하다. 창당한 지 불과 3년 만에 다시 해체하자는 주장에 국민이 공감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청와대가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기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정계개편 논의가 창당정신을 훼손하면서 민주당과의 통합 쪽으로 가닥이 잡힐 경우 청와대의 반격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윤 대변인은 “대통령도 한 사람의 당원이라는 점을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 할말 많은 ‘민주’▼

민주당은 30일 국회에서 대표단-의원총회 연석회의를 열고 “열린우리당과의 물리적인 통합은 절대 안 되며, 정계개편은 민주당이 주도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원내 의석 141석인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을 명분으로 민주당과의 연대를 요청하는 데 대해 12석의 민주당은 “통합을 해도 우리 뜻대로 하겠다”며 한껏 콧대를 세우는 모습이다.

한화갑 대표는 이날 회의에서 “열린우리당은 민주당에서 분당해 나간 업보를 청산하지 않으면 기댈 언덕이 없을 것”이라며 “민주당이 중심이 돼 한국 정치의 방향을 제시하고 틀을 새로 짜는 데 역할을 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김효석 원내대표는 “이미 심판을 받은 정당과의 양당 통합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낙연 의원은 이날 한 라디오 프로와의 인터뷰에서 “큰 틀에서 통합에 공감하지만 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들은 확실한 자기 정리를 해야 한다”며 “통합 신당이 ‘도로 민주당’이 아니라 ‘도로 열린당’이 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통합 신당의 대통령 후보는 정계개편 뒤 결정하는 게 순서”라며 “고건 전 국무총리도 이에 동의할 거라 본다”고 말했다.

조순형 의원도 “열린우리당 창당에 책임 없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건 좋지만 열린우리당이 당이나 집단적 차원에서 연대에 참여하는 건 불가”라는 의견이다. 한편 한 대표는 이날 자신이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에 대해 “민주당은 햇볕정책에 대해 기조를 바꿔 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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