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5-6共비화 회고록]<上>5共출범서 88년총선까지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11일 발간된 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시대의 정치 비사’는 1980년 이후 권력 핵심의 숱한 비화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만 1000여 명에 이르며 구체적인 날짜, 장소, 대화내용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박 전 의원의 주관적인 취사선택과 기술(記述)이어서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보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감안해 주요 내용을 시대 순으로 소개한다.》

○‘스리 허(許)’의 부침

5공 출범 초 허화평(許和平) 대통령비서실보좌관은 거의 모든 파워를 쥐고 있었다. 차기 대권에 대한 욕심도 있는 듯했다. 허화평은 ‘이철희(李哲熙)·장영자(張玲子)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까지 컨트롤하겠다는 기세로 사건을 확대해 나갔다.

허문도(許文道) 문화공보부 차관은 최병렬(崔秉烈) 조선일보 편집국장 등의 협조를 얻어 대통령 주변을 비판하는 분위기로 여론을 몰아가려 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분노했다. 1982년 12월 20일 허화평과 당시 대통령사정수석비서관이던 허삼수(許三守)는 전격 경질됐다.

민주화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당시 노태우 대표(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다. 노 대표는 같은 달 29일 ‘6·29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에 앞서 1981년 허화평은 현 야당의원인 K 부장검사의 옷을 벗기려 했다. K 부장검사는 내게 구명을 요청했고 일종의 ‘충성 맹세’인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내게 줬다. K 부장검사는 천신만고 끝에 검사장으로 승진했다.

○대법원장 후보 면접

1981년 3월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법원장 후보 면접시험을 봤다. Y 씨는 “국가안보가 민주주의나 기본권이나 인권보다 전제가 된다”고 했고, K 씨는 “대임(大任)이 주어진다면 법관들이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정부에 협력하도록 하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또 그해 4월 서울 하얏트호텔에 방을 잡고 대법원 판사 후보를 직접 면담했다. 눈에 띄는 사람이 45세의 이회창(李會昌·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이었고 대법원 판사로 강력히 건의했다. 이회창은 1988년 총선을 앞두고 민정당의 한시적 자문기구인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 법조계 몫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각하의 명이라면…”

1981년 추석 때 우병규(禹炳奎) 정무수석이 구 정치인들에게 전 대통령의 추석 선물을 전달한 뒤 반응을 보고했다.

우 수석에 따르면 김영삼(金泳三) 씨는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정치가 없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김종필(金鍾泌) 전 총재는 “1970년대가 스케이프고트(희생양) 되는 것은 잘못”이라며 ‘섭리와 운’ 얘기를 자주 언급했다.

또 이철승(李哲承) 씨는 “새 시대에 기여할 명분을 달라”며 적극적이었고, 3부 요인을 지낸 모 인사는 은인론(恩人論)을 펴면서 “각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각하 사진에 사인해 주면 걸어 놓고 보겠다”고 했다.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인생 아닌가. 국보위 시절 내가 전두환 장관이 대통령을 해야 한다고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얘기했다.

○역대 정보부장과 DJ 평가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10월 13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가(왼쪽부터)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7년 반 만에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리셉션에서 만나 담소했다. 3김씨는 모두 대선에 출마해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전 대통령은 노신영(盧信永) 안기부장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역대 중앙정보부장들에 대해서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김재춘(金在春) 김계원(金桂元) 이후락 신직수(申稙秀) 등은 다 엉터리였다. 머리도 나쁘고 능력도 없었다”고 혹평했다.

그 예로 전 대통령은 “과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암’에 걸렸다고 외신에 보도되자 윤필용(尹必鏞) 등이 ‘이후락 후계론’을 제기했다. 박 대통령이 이를 알고 (이후락을) 치려고 하니 점수 회복을 위해 당시에는 큰 영향력이 없던 김대중(金大中)을 납치해 오는 사건을 벌였다”고 말했다.

DJ에 대해 전 대통령은 “1982년 미국으로 갈 때 ‘정치에서 손떼고 건강에 유의하며 조용히 살겠다’고 각서까지 썼고 나는 7만∼8만 달러를 환전해 줬다”며 “내게 ‘기자들 인터뷰 요청에 부득이 응할 수밖에 없겠다’고 편지라도 한 장 쓰고 정치활동을 했다면 약속을 지키는 인물이 될 텐데, 그는 머리 나쁜 선동자에 불과하다”며 불쾌한 듯 말을 뱉기도 했다.

○“민정당 20년은 집권해야”

1986년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 등 주요 인사들과 시국대책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양주를 25잔이나 마신 뒤 노 대표를 보고 “옛날에 나는 술 먹으면 지프차에 여자 싣고 때로는 기분도 냈다. 노태우는 포커를 좋아했다. 휘파람도 잘 불고 술 먹어도 표시가 나지 않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며 신뢰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 대통령은 “민정당이 20년은 집권해야 한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DJ-YS 도망 못 가게 해라”

1986년 민주화 시위가 격렬해지자 전 대통령은 최악의 경우 친위 쿠데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9월 26일 전 대통령은 “군인은 전국적으로 위력 시위를 하라. 중앙청 앞에 탱크는 하루만 보이고 다음 날부터는 은폐하도록 하라”며 비상계엄 준비 지시를 내렸다.

10월 2일 국가안전기획부 안가로 쓰는 서울 프라자호텔 2172호에서 민정당 이춘구(李春九) 사무총장, 김태호(金泰鎬) 사무차장, 고건(高建) 의원과 내가 만나 10월 10일까지 (국회 해산에 대비한) 새로운 선거법안을 준비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틀 뒤 안기부 안가로 쓰는 서울 신라호텔 1473호에서 나와 고건, 내무부 안재헌(安載憲·여성부 차관 지냄) 과장 등이 첫 실무회의를 가졌다.

10월 30일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연행은 보안사,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출입국 관리를 철저히 해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을 우선적으로 막아라”는 등의 전 대통령 지침도 내려왔다. 그러나 그해 연말까지 더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월계수회의 출범

1987년 6월 23일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이 직선제 하자고 하더라.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6·29선언이 나왔고 ‘노태우를 위한 특공대’로 탄생한 게 월계수회(대선에서 반드시 승리해 월계관을 쓰자는 뜻)다. 월계수회는 약 200명의 이사진으로 구축됐다. 이들에게 논리무장을 시키기 위해 ‘노태우 스쿨’을 가동했고 나는 ‘박 회장’이란 가명으로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월계수회 참모장 역할을 맡은 강재섭(姜在涉·현 한나라당 원내대표) 검사는 월계수회 이사들에 대한 강연도 꺼리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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