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피살 의혹]대사관 14명이 교민 57명 못챙기나

  • 입력 2004년 6월 24일 18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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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대한민국 국민인 북한 이탈주민을 전혀 보호하지 않다가 (언론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대내외적인 비난에 직면하게 되자 비로소 선별적 수용정책을 취하고 있다.”

서울남부지법 이정렬(李政烈) 판사가 11일 탈북자를 도운 여권브로커 A씨에게 사실상 무죄인 ‘선고유예’를 선고한 판결문의 일부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은 이 판결문이 지적하듯이 ‘우리에게 정부는 무엇이고, 외교통상부는 왜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찬밥신세 영사(領事)업무=외교관의 핵심업무의 하나는 자국민의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외교관들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한미간 자동차 통상협상, 쌀 개방 협상, 유엔무대의 인권 외교 등 ‘화려한 업무’를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해외에 머무는 한국인의 신변 안전을 다루는 영사업무는 우선 순위가 떨어지는 ‘3D’ 업무로 간주되기 마련이다.

한 퇴임 외교관은 24일 전화통화에서 “해외이민을 온 교포, 현지 유학생, 조선족, 탈북자를 상대하는 일에 대해선 ‘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16일 드러난 중국당국의 탈북자 7명 강제 북송이나, 2001년 11월 불거진 ‘한국인 사형수 공문파문’도 이와 무관치 않다.

탈북자 강제북송 사건의 경우도 언론과 시민단체(NGO)가 3월 말부터 ‘강제북송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외교부는 “탈북자 북송은 없을 것이다. 중국이 최근 탈북자 문제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강변했다.

심지어 반기문(潘基文) 외교부 장관은 중국을 다녀 온 뒤 “단식 농성이 아니라 몇 끼 굶은 정도이다. 이들이 북송되지는 않을 것으로 안다”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인 마약사범을 처형한다’는 공문을 중국정부로부터 팩스로 접수하고서도 문서대장에 기록하지 않은 한국인 사형수 사건도 주중 한국대사관측의 업무소홀에서 비롯된 일이다.

▽예산 부풀리기=외교관들의 내부기강해이도 비판 대상이다. 지난해 12월 외교부의 한 직원은 자체 통신망에 “사적으로 친구들과 만나 저녁 먹고 술 한잔 하고는 법인카드 전표를 ‘총무’(역할을 하는 직원)에게 내미는 상사가 있다”며 외교관의 ‘돈 문제’를 꺼내들었다.

확인결과 이 사안은 5, 6년 전 ‘과거의 일’로 밝혀져 유야무야됐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의 품위와 자존심을 바닥에 떨어뜨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외교관들은 자성하기보다 “(예산 부풀리기는) 오래전 일일 뿐 지금은 없어졌다”며 언론비판을 오히려 문제 삼았다.

반 장관은 1월 취임 이후 ‘퍼블릭 디플로머시(대중외교)’를 강조하고 있다. 중요사항을 국민에게 정확히 설명함으로써 국민에 친근하게 다가서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외교부가 올 2월 일반국민을 상대로 실시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서 ‘외교부가 잘한다’는 응답이 단 5.0%에 머물고 있다.

▽김씨 피살 사건=가나무역 김선일씨 피살 사건을 다룬 주이라크 대사관의 업무는 ‘수준 이하’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 회사 김천호 사장은 김씨 피랍기간(5월 31일∼6월 21일) 중 바그다드 한국대사관에 6월 1, 7, 10, 11일 4차례나 방문한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외교부는 “김 사장은 업무협의차 들렀고, 그가 말하지 않는 한 우리가 피랍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김 사장이 왜 이렇게 자주 들렀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대사관 직원이 14명이나 되는데도 57명뿐인 교민의 신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대해 외교부측은 “철수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행동하는 교민들의 동선을 모두 파악해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가 평시도 아닌 전시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재외국민의 신체와 재산보호를 제1의 사명으로 하는 외교관의 항변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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