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4·15]환자… 상춘객… 탈북자… ‘신성한 한표’

  • 입력 2004년 4월 15일 18시 23분


15일 강원 태백시 태백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진폐증 환자들이 투표소로 가기 위해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
15일 강원 태백시 태백중앙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진폐증 환자들이 투표소로 가기 위해 간호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
제17대 총선 투표일인 15일 전국 대부분의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1인2투표 방식을 잘 모르는 유권자가 엉뚱한 데 기표를 하는 등의 해프닝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 투표=전직 대통령들도 이날 각기 집 부근 투표소를 찾아 투표권을 행사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는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동교동 제3투표소인 신촌성결교회에서 투표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탄핵정국의 여러 긴장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국정 안정에 뒷받침을 해왔다”며 “총선을 원만히 치러나가는 국민적 역량에 큰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부인 손명순(孫命順) 여사와 함께 오전 9시55분경 동작구 상도1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어쨌든 나라가 편했으면 좋겠다”고 간단하게 소감을 말했다.

노태우(盧泰愚) 전 대통령은 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와 함께 서대문구 연희1동 투표소에서 투표한 뒤 “탄핵으로 국민이 갈등을 겪고 갈라진 채 치른 선거여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李順子) 여사는 오전 9시경 연희2동 동사무소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번 선거는 조용하게 치러지는 것 같은데 이를 계기로 선거문화가 제대로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도 오전 10시20분경 마포구 서교동 자택 인근의 서교감리교회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투표했다.

서울 서초구 선거관리위원회 자원봉사자들이 15일 한 투표소에서 주민들에게 “저는 투표하였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은요”라는 스티커를 가슴에 붙여주고 있다. -연합

○…이색 투표=13일 부친상을 당한 경남 양산 한나라당 김양수 후보는 선거날인 15일 영락공원에서 발인제를 가진 뒤 가족 및 선거운동원 등과 함께 상복을 입은 채로 투표했다. 김 후보는 “16대에 이어 두 번째 도전하는 아들을 돕기 위해 뒷바라지를 하시다 돌아가신 만큼 아버님 영전에 꼭 당선증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부산 연제구 연산2동 항도어린이집 투표소에서는 파키스탄 출신의 와심 아흐메드(31)가 한국 귀화 후 첫 주권을 행사. 지난해 11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아흐메드씨는 “2주 전 이 아르샤드라는 이름으로 개명 신청까지 했다”며 “투표를 하고 보니 마침내 진정한 한국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북 김제에선 2001년 1월 한국으로 시집 온 필리핀 출신 네티타 카바카스(38·김제시 도장동)도 귀화 후 처음으로 주권을 행사했다.

지난해 1월 탈북한 이모씨(30) 부부는 경남 김해시 북부 제4투표소인 제2주공관리사무소에서 투표를 한 뒤 “투표란 것을 처음 하게 돼 좀 얼떨떨하고, 기표는 잘 했는지 걱정도 된다”면서도 “이제 정말 대한민국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해지역에는 26명의 탈북주민이 거주하는데 이 중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20명이다.

조선 왕조 왕손인 이석(본명 이해석·李海錫 황실보존국민연합회 회장)씨가 15일 전북 전주시 중앙동 제2투표소에서 투표. 이씨는 오전 11시경 투표를 마친 뒤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후보를 선택했다”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만이 나라를 부강하고 평안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의친왕(義親王)의 11번째 아들로 가요 ‘비둘기집’을 불러 왕족(王族)가수로도 널리 알려진 이씨는 지난해 9월 전주에 터전을 잡고 교동의 테마 한옥촌에서 민박시설을 운영 중이다.

한편 대구 서구 내당동 제4투표소인 사회복지시설 애락원의 투표가 오전 7시12분경 마무리돼 단위 투표소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투표가 종료됐다. 애락원 주민 40명은 이날 복지시설건물 보건병원 안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오전 6시부터 투표를 시작했다.

○…도서 및 격오지 유권자=독도의 유일한 주민인 김성도씨(65·어업)도 15일 오전 6시40분께 울릉읍 울릉초교에 마련된 제1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했다. 독도에 사는 김씨는 “투표는 꼭 해야 한다”며 13일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울릉읍 도동에 와서 대기했다.

반면 울릉읍 저동리 죽도에 사는 단 두 명의 주민인 김기철씨(60)와 김씨의 아들 유권씨(35)는 이날 기상악화로 선박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저동 수협에 설치된 제2투표소에 가지 못하고 투표를 포기했다.

인천 강화군 삼산면 미법도에 거주하는 주민 23명은 오전 9시반 유권자 전원이 투표를 마쳤다. 이장 정영길씨(51) 등 주민들은 이 섬에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아 여객선을 타고 인근 석모도에 도착해 버스로 갈아타고 제1투표구에서 주권을 행사했다. 이 섬 주민들은 지난 15, 16대 총선에서도 외지에 나간 사람을 제외한 거주자 100%가 투표에 참가했다.

국립공원 설악산관리사무소 대청분소(해발 1708m) 직원 7명도 3시간이나 걸리는 5km의 등산길을 내려와 양양 등지 자신의 집 주변 투표소에 가 주권을 행사. 3명은 투표일 전날인 14일 오후에 하산해 다음날 오전 투표를 마쳤고 나머지 4명은 투표를 마친 직원들이 복귀하는 오후에 하산해 투표했다. 손관수 분소장은 “대피소를 비울 수 없어 교대로 투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표장 주변의 정치얘기=서울 서대문구 연희1동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문병순씨(52)는 동행한 딸 미혜씨(24·대학생)에게 “촛불시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투표 소감을 설명. 그러나 미혜씨는 “집에서 토론도 해봤지만 아버지와는 다른 입장”이라며 “여성의 국회 진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여성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고 응수했다.

서대문구 연희1동에 사는 최말자씨(62·여)는 “선거 때 투표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노인들 투표하지 말라’는 말 때문에 일부러 나왔다”고 말해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동작구 상도1동 제1투표소에 나온 손승언씨(64)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다 넘기고 나라 경제를 이만큼 이룬 우리더러 투표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한편 1인2표제 곳곳서 혼선=이날 투표과정에서는 이번 총선에 처음 도입된 1인2표제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혼선이 빚어졌다. 경기 광주시 송정 4투표소에서는 50대 남성 유권자가 4장의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려다 선거참관인에게 발견돼 이 중 2장이 사표처리 됐다. 이 유권자는 후보자용 투표용지와 정당투표용 투표용지 각각 2장씩 기표한 뒤 투표함에 넣으려다 제지당한 것. 선관위는 “이 유권자가 투표용지 2장에 기표해야 하는 것을 각 투표용지 2장씩 기표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울산 중구 우정동 우정성당 투표소에서 70대 초반의 할머니는 투표에 앞서 동행한 며느리로부터 1인2표제에 대해 한참 설명을 들었으나 여전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투표하기가 이렇게 어려우니까 노인들에게 투표하지 말라고 그랬구나”라고 말해 투표장에 있던 30여명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투표 도우미=경남 마산에서는 마산소방서 삼진소방파출소 소속 119구급대가 구급차량을 이용, 진전면 소재 장애인 보호시설 ‘소망의 집’ 장애인 16명을 투표장으로 수송했다. 소방서 구급차량은 소망의 집에서 면사무소간 10여km를 3차례에 걸쳐 왕복 운행했다. 광주 남구 주월1동 2통장인 한혜숙씨는 자신의 승용차에 ‘투표소 안내차량’ 마크를 부착하고 제4투표소인 대동고 입구의 급경사 오르막길을 왕복하며 노약자들을 태워 옮겼다. 각 투표소에는 선관위가 모집한 중고교생들이 투표 도우미로 활약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서대문구 연희1동 투표소에서는 신한뫼군(13·이화여대부속중 1학년)이 ‘투표 도우미’라고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노인과 장애인을 부축해 투표장으로 안내했다.

총선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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