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장관급회담 3박4일 ‘작은 전쟁’

  • 입력 2003년 10월 23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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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부터 3박4일 동안 평양 인민문화궁전 2층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1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선 남북간 두뇌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회담 내용은 대회의실 건너편에 100평 규모로 마련된 상황실에 폐쇄회로(CC) TV를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 이곳은 회담기간 내내 도청 방지를 위한 ‘소음’이 뒤섞여 흐르는 심리전 장소로 돌변했다.

한쪽에선 서울에서 준비해 간 ‘조용필 히트가요’가 녹음기를 통해 흘러 나왔고, 영국 BBC방송과 중국 CC TV도 틀어져 있었다. 통풍구나 화재경보기 옆에 부착해 놓은 도청방해 장치(일명 삐삐)에선 ‘삐리릭∼’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 참가자는 23일 “노래, 중국어 및 영어 방송, 기계음에 둘러싸인 채 회담대표의 발언을 경청하고 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고 말했다. 상황실을 지키는 15명 안팎의 수행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은 기본. 한 당국자는 “이런 상황은 서울에서 열릴 때 북측 상황실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 차려진 상황실과의 교신을 위해선 전화기와 팩스를 서울에서 직접 가져갔다. 손잡이를 4, 5차례 돌려서 전화를 거는 ‘야인시대’풍의 전화 2대, 비화(秘話)기능을 갖춘 팩스도 동원됐다. 또 서울과 통화할 때는 가급적 실명(實名)과 직함을 쓰지 않고, “홍 선생, 저 박입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회담장 안에선 남북의 대표가 5명씩 테이블에 마주 앉고, 공식 수행원 5명이 뒤쪽에 배석한다. 그러나 회담하는 동안 오가는 발언의 99%는 수석대표인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과 북측 김영성 내각 책임참사의 몫이다. 혼선을 피하기 위해 창구 일원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담을 앞두면 통일부 남북대화사무국은 긴장에 휩싸인다. 북한 대표단의 예상 발언, 대응 논리를 일일이 점검하고, ‘내가 북한 대표라면’이란 가정 아래 북한의 예상 기조 발제문을 미리 작성해 보는 등 북측의 돌발적인 요구 가능성에 치밀하게 대비한다.

회담 시뮬레이션도 실시한다. 주로 남북대화사무국 소속 상근대표들이 북한 대표 역할을 맡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실제 상황을 연출한다.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북한 말투에 익숙한 회담전문가가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쳐 가면서 남측의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회담장 밖에서 남측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한 ‘바람잡기’도 남북간 심리전의 한 방식. 북측 인사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을 기자들에게 슬쩍 흘리기도 한다.

김승련기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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