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총장 인터뷰 “대학서열 철폐 주장은 포퓰리즘”

  • 입력 2003년 7월 21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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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정운찬 총장. 정 총장은 포퓰리즘에 대해 “결과적으로 대중도 좋아하게 되면 괜찮지만 그 출발점이 ‘대중이 좋아할 거야’ 하는 식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석교기자
서울대 총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정운찬 총장. 정 총장은 포퓰리즘에 대해 “결과적으로 대중도 좋아하게 되면 괜찮지만 그 출발점이 ‘대중이 좋아할 거야’ 하는 식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석교기자
《어린 시절 정운찬(鄭雲燦·57) 서울대 총장 집에는 라디오가 없었다.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어 경기고 재학 시절 정 총장의 음악 성적은 바닥이었다. 사석에서는 “음악 점수 때문에 1등 한번 못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9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정 총장은 경기중고교를 어렵게 다녔다. 고교 1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생을 상대로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월 3000원을 받아 학비도 내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원서(축약판)도 사서 읽었다.

“나는 점심을 거를 정도였는데 그 집에는 골프연습장이 있었다. 그런 부자들도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사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와 형편이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도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와 서로 자극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각을 해내지 않겠는가.”

20일 취임 1주년을 맞은 정 총장은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서울대의 경쟁력을 ‘다양성’에서 찾겠다고 했다. 다양성 확보를 위해 내놓은 신입생 선발제도가 이른바 ‘지역할당제’로 알려진 ‘지역 균형 선발전형’이다. 정 총장은 또 엘리트 육성과 고교 입시 부활을 강조했다.》

● 입주 과외교사 시절 배운 ‘다양성의 힘’

―지역 균형 선발제는 교육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방 학생들을 배려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국립대로서 사회 통합 기능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재 육성이라는 또 다른 토끼를 놓치는 것 아닌가.

“이 제도의 원래 취지는 사회적 약자 배려가 아니라 수월성(秀越性) 추구다. 서울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학내 구성원을 다양화해야 한다. 시험 보는 능력보다 창의력이 중요한 시대다. 창의력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교류하면서 얻을 수 있다. 동질적인 집단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나오기 어렵다.”

―이 제도가 도입되면 서울대 입학생의 학력이 더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내신도 학습 능력의 척도다. 그리고 신입생의 일정 비율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 위주로 뽑는 등 전형 방법 자체를 다양화할 계획이다.”

정 총장은 이 제도를 놓고 ‘교육을 사회복지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취지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나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다”고 단언했다.

―포퓰리스트가 아니라면 엘리트주의자인가.

“내 생활이 엘리트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가 있다. 서울대는 사회를 리드할 정예의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

―서울대가 길러내려는 리더란 어떤 사람인가.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더는 지식적으로 모든 분야를 조금씩은 알고 특정 분야는 완벽히 알아야 한다(you must know something of every-thing, and everything of something). 또한 리더는 건설적 비판능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겸비하고 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한다.”

● 서울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니…

―‘서울대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석에서 ‘서울대를 폐지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정 총장이 있어서 폐지할 수도 없고…’라고 한 적이 있다. 대학 서열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정부가 ‘학벌주의 극복 방안 수립을 위한 합동기획단’을 꾸려 연말까지 종합대책을 내놓기로 한 것을 보면 일부의 주의, 주장으로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취지에서 하는 것이겠지만 서울대 폐지는 힘들 것이다.”

―서울대 출신이 요직을 독식하는 것은 정 총장이 말한 ‘다양성 확보’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 아닌가.

“미국 영국 일본 등도 요직에는 대부분 일류 대학 출신들이 앉아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운동권 출신 주요 인사들도 대부분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는가.”

―정부가 고교 평준화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고교 입시 부활을 재고해 봄직하다. 18세까지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학생 개인에게 가혹한 일이다. 고교 입시에서 장래를 판단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또 평준화 체제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일류대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많은 경우 학교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므로 과외를 받아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고교 입시가 부활돼 우수하지만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평준화정책이 하향 평준화를 초래한다’는 사회 통념과 달리 전체 학생의 평균을 오히려 높여 놓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평균은 올려놓았을지 몰라도 정말로 우수한 학생을 길러내는 데는 실패했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최고를 추구하는 학생들을 배려해야 한다.”

―고교 입시를 부활하면 과외비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큰데….

“입시를 위한 과외는 늘어날지 모르지만 교과 과외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현실적으로 과외를 막기는 어느 환경에서든 어렵다. 지금보다 과외가 더 성행하겠는가.”

―사회학자인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정 총장을 중도주의 지식인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동의한다. 극우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좌가 될 준비는 안 돼 있다. 현 정부의 진보적 성향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보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지 않기 때문에 진보든 보수든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팩트(사실)에 대한 이해다. 최선의 정책은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도 알기 힘들다. 하지만 차선이라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오늘 이 말 했다 내일 저 말 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팩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분석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하는 것인가.

“그렇다. 기본이 부족하다. 그리고 방향감각이 없거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총장의 전공 분야인 경제 정책에서 아마추어리즘의 예를 들어 달라.

“정작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인데 이것은 소홀히 한 채 경기 부양만 추구하는 것이다.”

―올 4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사회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는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발언할 생각인가.

“서울대 총장으로서 제약이 많다. 내가 할 일은 서울대를 잘 꾸려가는 것이다. 취임 후 지금까지는 학내 갈등을 치유하는 데 노력했다. 남은 3년 동안은 구조조정을 해나가겠다.”

● 정예 대학 되려면 정원 대폭 줄여야

―구조조정에는 정원 축소도 포함되나.

“서울대 신입생이 4000명이다. 미국 대부분의 대학은 1500명을 넘지 않는다. 이 수준까지는 어렵겠지만 많이 줄여야 한다. 서울대 대학원생은 등록생 기준으로 1만1000명이다. 하버드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하버드대는 이 중 대부분이 로스쿨 등 전문 학위 과정인데 우리는 순수 학위 과정에만 몰려 있다. 수는 줄이고 내용은 강화해야 한다.”

―대법원이 25일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도입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다. 서울대는 어떤 견해인가.

“찬성이다. 사회 분위기가 성숙되면 서울대가 먼저 나서 길을 터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스쿨이 도입되면 학부 과정에서 법대는 없어지거나 소수 정원만 남게 될 것이다.”

―커리큘럼에도 변화를 줄 생각인가.

“유니버시티 칼리지 제도를 도입하고 싶다. 미국 대학들처럼 많은 학생을 학과 구별 없이 뽑은 뒤 2년간 기초 교양을 철저히 가르치고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하는 제도다. 졸업 학점은 줄이되 인텐시브하게 가르치겠다. 글쓰기 말하기 토론 교육도 철저히 시킬 계획이다.”

―대학이 발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학벌 폐지 운동이 진행된다면 서울대가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정부가 지역 균형 발전을 명목으로 연구비 지원에서 서울대를 차별한다는 주장이 학교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문제삼겠다. 서울대는 과학논문색인(SCI) 게재 논문 수를 기준으로 세계 1만여 대학 중 34위다. 열악한 현실에서 선전한 결과다. 여기서 퇴보하면 안 된다. 파이를 키우지 않으면 균형도 발전도 없다.”

―총장 재임 기간에는 절대 한눈팔지 않겠다고 했는데 임기가 끝나면….

“서울대 총장 지내고 갈 만한 곳이 많지 않다. 함부로 간다면 서울대 총장 자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학벌주의 관련 말말말▼

학벌주의 관련 말말말

▽“대학 서열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종의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한다.”(정운찬 서울대 총장, 2003년 7월 본보 인터뷰)

▽“학벌주의 극복 정책이 개인의 실력과는 무관하게 골고루 자리를 나누는 방향으로 시행될 소지가 있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안경환 서울대 법대학장, 2003년 6월 대한매일 기고문)

▽“학벌사회가 타파되지 않고서는 대학의 서열화 구조, 사교육비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없다.”(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2003년 6월 대한매일 인터뷰)

▽“성(性) 장애 학벌 외국인 비정규직 등에 대한 5대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사회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국가인권위원회, 2003년 1월 발표)

▽“입시 경쟁은 학벌 위주의 사회와 대학 서열화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학벌 사회를 실력 사회로 바꾸고 대학 서열화를 개선하겠다.”(노무현 대통령, 2002년 12월 대선후보 TV 합동토론회)

▽“학벌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현실이 신종 신분제 사회를 만들고 있다. 군벌의 시대는 가고 재벌의 기세도 한풀 꺾였는데 학벌의 위세는 더 극성스러워지고 있다.”(김동훈 국민대 법대 교수, 2002년 12월 본보 인터뷰)

▼정운찬 총장은…▼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66학번으로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76년부터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를 지내다 78년 서울대 경제학과로 옮겨옴. 86∼87년 영국 런던정경대(London School of Economics) 객원교수, 99년 봄학기 독일 보쿰대 초빙교수를 지내며 “미국의 학풍은 좁되 깊고 유럽의 그것은 넓다”고 느낌. 2002년 서울대 사회과학대 학장을 지내다 총장에 당선.

주요 저서로 ‘경제학원론(공저)’ ‘거시경제론’ ‘금융개혁론’ ‘중앙은행론’ ‘화폐와 금융시장’ 외 다수.

자칭 ‘미시적 케인스주의자’로서 “한국처럼 시장경제가 확립되지 않은 곳에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의 수제자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 대학 동기들 가운데는 잠재력 있는 인물이 많았는데 선생님의 논리를 리폼(reform·뛰어넘기)하지 못하고 콘폼(conform·따르기)만 해 선생님처럼 크게 된 인물이 없다”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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