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에 갔다] 檢 “진상규명 포기하란 말인가”

  • 입력 2003년 1월 30일 20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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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현대상선의 대출금 2235억원이 대북 관련 사업자금으로 사용됐다’는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대해 30일 “사법심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서는 “수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한 뒤에 판단해야지 대통령 혼자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 경실련 사무총장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는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은 국민과 국회의 사전동의 없이 정권적 차원에서 독단적으로 결정된 위헌적인 것으로 김 대통령의 발언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변호사는 또 “이번 사안은 국민의 동의 없이 세금이 북한으로 지원된 것이기 때문에 검찰 수사나 국회 차원의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법대 성낙인(成樂寅·헌법학) 교수는 “현대상선이 무슨 명목의 돈을 어떤 방법으로 북한에 전달했는지, 그 과정에 정부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먼저 밝혀져야 사법심사 대상이 되는지를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선수(金善洙) 사무총장은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되려면 실정법 위반 혐의가 적용돼야 하는데, 단지 돈을 준 사실만으로 어떤 처벌이 가능한지 현재로서는 모호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관련자 15명을 출국금지하고 이 사건에 대한 본격 수사 준비에 들어갔던 검찰은 이날 오후 긴급회의를 열고 앞으로의 수사 방향을 논의하는 등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대북지원 의혹의 실체 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검찰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의혹의 핵심이던 대출금의 사용처에 대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밝힌 상황에서 검찰의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검의 한 검사는 “이번 발표로 대출금 사용처 규명에 관한 한 검찰의 부담이 상당히 줄었다”면서도 “수사로 진상규명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검찰은 설 연휴 이후 수사 방향을 확정한다는 방침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감사원 발표 내용과는 별도로 실체 규명을 위한 본격 수사에 착수하는 방안과 김 대통령이 사실상 ‘통치행위’라고 밝힌 만큼 수사를 종결하는 방안 등 여러 가능성을 놓고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북한에 송금된 돈의 구체적인 사용처와 대출 경위 등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할 경우 수사 진행상황에 따라 정치 외교적 파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수사 종결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한나라당이 특별검사제 도입이나 국정조사 등을 요구하는 등 강한 반발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검찰 안팎에서는 그러나 현대상선의 대북 송금 행위가 사법심사 대상이 아닌 ‘통치행위’인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현대상선의 대출 경위와 대북 송금과정 등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어서 이를 위한 검찰 수사는 필요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이태훈기자 jefflee@donga.com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처벌은 어떻게▼

‘4000억원 대북 지원 의혹’과 관련해 감사원이 30일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북한에 2235억원을 송금했다”고 밝히면서 송금 자체의 위법성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돈의 성격과 전달 과정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법률이나 위법성 여부가 크게 달라진다고 입을 모은다.

일단 현대상선이 정부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거나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송금했다면 관련자들은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될 수 있다. 관련 법규상 북한과의 자금거래는 외국환거래법을 준용해 재정경제부장관에게 신고하도록 돼있다. 따라서 현대상선이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통일부장관의 ‘허가’를 받고 재경부장관에게 ‘신고’한 뒤 북한에 송금한 것이 아니라면 외화밀반출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또 국정원이 송금 과정에 ‘편의’를 제공했다면 불법행위의 공범으로 처벌될 수 있다. 산업은행의 경우 현대상선의 상환능력이나 대출 기준 등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대출을 해준 것으로 드러나면 배임 혐의가 적용된다. 이 과정에 정권 고위층 관계자 등이 압력을 행사했다면 직권남용으로 처벌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상선이 ‘사업상 필요’에 의해 북한에 돈을 보냈다면 업무상 배임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업무상 배임 혐의가 인정되려면 회사의 이익에 반해서 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져야 하는데 국가적 지원 아래 활발한 대북사업을 벌이던 현대측이 “사업자금으로 보냈다”고 주장하면 배임 혐의로 인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

일각에선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북한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상 이적행위로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국보법에 기업의 북한에 대한 자금지원을 처벌토록 규정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이적행위는 성립될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북 송금이 국익(國益)을 고려한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관련자들을 처벌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사법심사의 대상이 안 된다’는 언급은 통치행위와 관련된 판례 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통치행위에 대해서 ‘실정법의 잣대’를 마구 들이대기 어려운 현실 등을 감안하면 대북 지원의 ‘단순 창구’로 이용된 현대상선이나 산은, 국정원 관계자들에게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대출알선 대가로 정치인 등의 금품수수 사실이 밝혀질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이나 알선수재 혐의로 처벌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이상록기자 myzod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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