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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23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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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통합의 정신, 겸손과 단호의 논조, 힘과 감동의 문장.’
노무현 대통령당선자가 참석한 가운데 20일 첫 회의를 가진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취임사의 기본 방향이다. 핵심은 ‘감동적인 취임사’.
준비위원들은 취임사가 새 대통령의 정치철학과 정책 기조를 국민에게 공표하는 것인데도 반세기가 넘은 우리 헌정사에 기억에 남을 만한 취임사가 하나도 없다는 데 공감하고 이번에는 ‘명취임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준비위원장을 맡은 한림대 지명관 교수(지성사)는 “노 당선자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의 통치철학과 정치 방향을 담으면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취임사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감동적인 취임사’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정치철학. 준비위 첫 모임에서는 우선 노 당선자의 정치철학을 들으며 취임사 전체의 가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당선자는 신뢰, 공정, 성실, 절제, 헌신, 책임을 자신이 중시하는 6대 덕목으로 들고, 개혁과 통합을 기반으로 한 국정운영의 5대 원리로 원칙과 신뢰, 대화와 타협, 투명과 공정, 분권과 자율, 균형과 통합을 제시했다. 또 “지도자는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판단력과 통찰력, 그리고 그 결과를 실천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준비위는 문안 작성을 위해 위원 중 김종심 저작권심의조정위원장(전 동아일보 논설실장),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정치학)로 집필소위원회를 구성했다. 김 집필소위 위원장이 노 당선자의 정치철학을 큰 틀로 해서 초안을 작성하고, 집필소위에서 준비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수 차례 수정을 하게 된다. 50대 후반인 김 위원장의 경륜이 각각 시민사회론자와 정치개혁론자로 알려져 있는 40대 초반의 김, 조 교수의 패기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가 관심.
김 위원장은 “준비위원을 공개했다는 것은 모든 절차를 투명하게 하겠다는 뜻”이라며 “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개혁과 통합’이라는 노 당선자의 철학을 담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당선자는 또한 첫 모임에서 국정 목표로 과학기술 혁신, 시장제도 개혁, 품격 있는 문화형성,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새로운 지방화 구현 등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책의 구체화에는 대통령직인수위에 소속된 한림대 성경륭(사회학·기획조정분과 위원), 고려대 임혁백(정치학·정치개혁연구실장), 경북대 이정우 교수(경제학·경제1분과 간사)가 중심 역할을 맡게 된다. 이들은 인수위가 최근 발표한 12대 국정 과제를 중심으로 앞으로 노 정부 정책의 골격을 취임사에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총괄과 감수를 맡은 지명관 위원장, 대외창구를 맡은 이낙연 대변인 외에 소설가 김주영씨는 작가의 통찰력과 문학적 감성으로 취임사에 ‘감동’을 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준비위원들은 24일 두 번째 모임에서 의견을 수렴하고 초안을 작성한 후 수 차례의 수정을 거쳐 노 당선자와 함께 문안을 최종 확정하기로 했다.
새 대통령의 정치관을 담은 취임사는 앞으로 5년을 이끌어갈 국정의 청사진이자 국민과의 신성한 약속이다. 2월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식 이후, 한국인들도 기억할 만한 감동적 대통령 취임사 한두 구절쯤은 가지게 될 수 있을까?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한국엔 왜 名 문장이 없었나 ▼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봅시다.”
발표된 지 4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대통령 취임연설. 1961년 1월20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밝힌 ‘명문장’이다. 하지만 50년 이상, 16차례나 대통령 취임이 이어진 한국의 취임연설 중에는 명문으로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다. 어떤 이유일까.
연세대 최평길 교수(행정학과)는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취임사를 만들 때 일반적 행정관료와 인수위 분과위원들이 당선자의 ‘철학’이 없이 기계적으로 만들어서 조합해왔다”고 이유를 꼬집었다. “이른바 ‘혼’이 들어가지 않은 취임 연설”이라는 것.
고려대 함성득 교수(행정학과)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함 교수는 “역대 취임사는 당선자의 국정 비전이 명확히 제시된 적이 없다”며 “오히려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의견만을 담으려다 보니 취임사에 힘이 빠졌다”고 말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통치 비전이 제시되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만을 쫓은 것이 흠.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각각 ‘너무 추상적’이거나 ‘공약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 단점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어떤 취임사가 좋은 취임사일까.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사가 우선 꼽힌다. 당선자의 통치 철학이 먼저 나온 뒤 구체적인 정책과 대국민 공약이 이어지는 순서를 밟았다. 시인 또는 어문학자가 ‘문장’을 봐주고 적절한 ‘고사(故事)’를 넣어주는 것도 좋은 취임사의 요건.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 하버드대 영문학자들이, 레이건 대통령은 UCLA와 스탠퍼드대의 영문학자가 취임 연설을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재선 취임 연설에서 성서를 인용해 노예 해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명연설이 나오려면 시대 상황이 배경이 돼야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히피 문화의 만연 등 ‘혼란’이라는 시대 상황에서 ‘뉴 프런티어’라는 명확하고 새로운 목표와 과제를 던졌다.
독일 혼란기에 프로이센의 총리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취임 연설에서 ‘철혈정책’을 주장해 결국 독일 통일을 이끌어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재선 취임 연설에서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시대’를 언급한 뒤 ‘다리(Bridge)’라는 상징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새 시대의 강력한 미국을 강조해 미국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유럽에도 ‘명연설’은 더러 있지만 미국에 비해 ‘명 취임 연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최평길 교수는 “내각책임제가 대부분인 유럽의 총리 취임 연설은 대중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의원을 상대로 행해졌기 때문에 ‘인상적’이라기보다는 짧고 차분한 연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대중을 움직인 해외의 名 취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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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사력에 의존해 풀어가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연설과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철(鐵)’과 ‘혈(血)’로 해결되어야 합니다.(프로이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 취임연설, 1862년)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태복음 18장7절)
미국의 노예 제도가 ‘실족케 하는 일’중 하나라면…그리고 실족케 하는 죄를 짓게 한 자들로 인한 재앙을 징벌하고자 신께서 남과 북으로 하여금 이 끔찍한 전쟁을 치르게 하신 것이라면, 살아 계신 신의 뜻이 아닌 어떤 다른 뜻을 우리가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미국 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재선 취임연설, 1865년)
▽ 국민 여러분,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봅시다. 세계의 모든 국가 국민들, 미국이 당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묻지 말고 다 함께 자유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봅시다.(미국 제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연설, 1961년)
▽ 자, 우리 모두 결심을 새롭게 하고 힘을 냅시다.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새롭게 합시다. 정당하고 영웅적인 꿈을 가집시다.…저는 영웅을 말할 때 ‘그들’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여러분’이라는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말하는 영웅은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미국 제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취임연설, 1981년)
▽우리는 마지막 세기에 와 있습니다. 새 세기의 출발점에 와 있습니다. 그동안 존재해온 민주주의를 쇄신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나갑시다. 모든 집단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끝없는 노력으로 여행을 떠납시다. 여행은 영원히 지속돼야 하며 역사의 새 장을 위하여 우리는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미국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 재선 취임연설, 1997년)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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