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대선후보 검증]<하>정치인 정몽준

  • 입력 2002년 9월 19일 17시 02분


99년 4월 한일의원축구대회 참석차 방일한 정몽준 의원이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를 예방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제공 정몽준 의원측
99년 4월 한일의원축구대회 참석차 방일한 정몽준 의원이 오부치 게이조 당시 일본 총리를 예방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제공 정몽준 의원측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88년 13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당선돼 3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대부분의 시기를 무소속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나 4선의 중진의원인데도 ‘선량(選良)’으로서의 그의 행적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무소속이 좋다?〓당초 84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부친인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 명예회장은 그를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은 정 의원을 직접 불러 출마를 포기시켰다. 회사 돈을 가져다 정치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13대 총선 때는 민정당이 정 의원에게 출마를 권유했지만 그는 민주화열기의 폭발로 민정당의 인기가 하락하자 공천 제의를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정 의원은 3당 합당 직후인 90년 3월 거대 여당인 민자당에 잠시 몸을 담았다. 당시 민자당 관계자들은 “정 의원이 먼저 입당 의사를 밝혀 왔다”고 말했으나 정 의원은 “당시 무소속이 두 명뿐이었고, 친하게 지내던 고(故) 김동영(金東英) 의원의 권유도 있어 입당했다”고 밝혔다.

▼글 싣는 순서▼

- <上>성장기와 가족사
- <中>체육-경영인으로서의 리더십

그는 91년 11월 국회 경제과학위 민자당 간사로서 민자당 의원들과 함께 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여당 의원들만으로 개회를 선언해 쟁점법안 5가지를 날치기 처리하기도 했다.

92년 1월에는 부친인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자 민자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에 입당한 뒤 정책위부의장과 부산-경남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뛰었다. 대선 패배 이후 93년 2월 국민당이 공중분해된 이후에는 다시 무소속으로 돌아왔다.

정 의원은 이후 무척 조심스러운 행보를 계속했다. 현대그룹이 정치권의 외풍에 휩쓸리는 것을 막고 ‘초당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적 고려가 담겨 있는 처신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또 그가 기성 정당의 운영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국민당 시절 정치인들이 돈 때문에 이전투구하는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 김용환(金龍煥) 의원이 2000년 ‘희망의 한국 신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만나 참여 일보 직전까지 갔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지막 단계에서 합류를 거부했다.

▽빈약한 의정활동〓오랜 무소속 생활과 축구협회 활동에 더 비중을 두었던 탓에 그의 원내활동에 관해서는 “별로 기억할 만한 게 없다”고 말하는 의원들이 많다.

지난 2년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활동을 같이 한 민주당 의원은 “월드컵 때문이었겠지만 회의 시간에 제대로 맞춰 온 적이 거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끝나면 곧바로 자리를 뜨곤 했다”고 말했다.

같은 기간 중 통외통위를 함께 했던 한나라당의 한 의원도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의 자잘한 문구의 표현을 문제삼으며 정색을 하고 장시간 장관을 호통치는 것을 보고는 ‘문제의 본질은 저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통일부의 한 국장도 “가끔 지엽말단적인 것을 물어보는 등 흐름에서 벗어나고 자료 축적도 잘 안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통외통위에서 현대와 관련된 문제가 거론되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99년 9월 그는 통외통위에서 전해 상임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정몽헌 당시 현대그룹 회장(정 의원의 넷째형)에게 한나라당 이세기(李世基) 의원이 반말투로 질문했다는 점을 문제삼아 이 의원과 장시간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또 국군의 동티모르 파병동의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99년 9월 그는 통외통위에서 파병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해놓고, 다음날 본회의 표결에서는 찬성표를 던지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2000년 2월 총선시민연대는 정 의원을 ‘낙선운동 대상자’ 명단에 올렸다. 15대 국회 4년간 법안 발의가 1건에 불과했고, 결석률이 82.5%에 이르는 등 불성실한 의정활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같은 무렵 경실련이 발표한 의정활동평가에서도 조사 대상 298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정 의원은 290등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9월 현재까지 14년간의 의정생활을 통틀어 그가 대표발의한 법안도 4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동료의원들은 재벌 출신 의원답지 않게 짜다고 그를 평가한다. 2000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그는 동료 의원의 후원회 행사 때 ‘품앗이’ 형태로 관행화돼 있는 후원금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 참모의 건의로 최근에는 100만원 정도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또 일부 젊은 의원들에게 생일과 명절은 물론 평상시에도 선물을 꾸준히 보내며 나름대로 ‘관리’를 하고 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초원복집 사건 개입 논란▼

92년 대통령 선거 직전 발생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은 정몽준 의원에게는 정치적 부담이다.

그해 12월 11일 법무부장관직을 막 물러난 김기춘(金淇春·현 한나라당 의원)씨와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회동해 민자당 김영삼(金泳三) 후보를 밀기로 한 대화내용을 정 의원이 주도해 비밀녹음한 것이 사건의 개요. 정 의원은 당시 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아버지 정주영(鄭周永)씨를 돕고 있었다. 이 사건은 처음엔 관권선거 논란을 빚었으나 ‘불법 도청’사건으로 비화되면서 오히려 영남지역을 결집시키는 역풍(逆風)으로 작용했다.

정 의원은 도청 테이프를 건내받고 도청 관련자 4명에게 1000만원씩의 도피자금을 준 혐의가 재판에서 사실로 인정됐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수사팀 관계자는 18일 “그때는 도청을 처벌하는 법규가 없어 고민 끝에 결국 관련자들을 주거침입죄와 범인 도피 혐의로 기소했다”며 “직접 도청했던 사람들이 정 의원에게 보고해 정 의원도 관련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소형 녹음기 등 증거물도 확보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의 본말이 전도됐다는 것이 정 의원의 항변이다. 즉, 관권 부정선거의 증거를 수집해 신고했더니 검찰이 적반하장격으로 증거수집을 위해 불가피하게 동원한 비밀녹음만 문제삼았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이에 대해 “도둑을 잡으러 쫓아가다가 남의 집 장독을 깼는데, 검찰이 도둑은 안 잡고 장독 깬 사람만 잡은 격이다”며 “법원이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 것은 결국 무죄나 다름없음을 말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정 의원의 한 변호인은 “정 의원이 정치적으로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법리적으로는 사생활 침해라는 위법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부인 김영명 여사는▼

“다른 것은 몰라도 부인만큼은 경쟁력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19일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金寧明·46·사진)씨에 대해 이같이 논평했다.

정 의원의 한 측근도 “아버지인 김동조(金東祚) 전 외무장관을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0년간 외국 생활을 했지만 수수하고 한국인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고 김씨를 평가했다.

미국의 명문여대인 웰즐리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김씨의 영어는 수준급. 88 서울올림픽 유치와 92년 대선 당시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고, 남편의 월드컵유치 때도 맹활약해 ‘미스 스마일 월드컵’이란 애칭을 얻기도 했다.

물론 김씨가 성장기를 외국에서, 그것도 외교관의 딸로 보낸 까닭에 ‘보통사람’의 생활정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정 의원은 “기선이 엄마(김씨를 지칭)의 오랜 외국생활은 단점도 될 수 있지만 각종 연고로부터 자유로워 불필요한 구설을 낳을 소지가 없다는 점에서는 장점도 된다”고 말했다.

다만 모두 명문 K여고 출신인 김씨의 세 언니는 최근 김씨에게 여러 지인들을 부지런히 소개해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급속한 인맥형성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김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처음에는 아이들의 반대와 엄마로서의 걱정 때문에 출마를 반대했으나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해 결정을 내린 남편을 적극 돕는 게 아내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일단 결심한 이상 남편이 못 가는 곳까지 가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들이 어려워하는 얘기를 남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판단은 어디까지나 남편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주위서 보는 정몽준▼

“골프를 몇 번 같이 쳐봤는데 신중하고 침착하더라.”(한나라당 L의원)

“돌발적으로 화를 내거나 터프해질 때가 왕왕 있다.”(전직의원 A씨)

정몽준 의원의 성격과 스타일에 관해 동료의원들 사이에는 ‘젠틀맨’이란 평가와 ‘거칠고 충동적’이라는 증언이 엇갈린다.

정 의원의 측근인 강신옥(姜信玉) 전 의원은 “정 의원은 어떤 정치적 판단을 하기까지 주변에 숱하게 의견을 묻는다.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겸손함과 조심스러움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거친 행태는 동료 의원들간에도 적지 않게 화제가 돼왔다. 99년 통일외교통상위 소속으로 일본에 국정감사를 함께 갔던 한 전직의원은 “교포사업가인 L모 회장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폭탄주가 서너순배 돈 뒤 갑자기 정 의원이 평소 유감이 있었던 듯 동료 의원에게 욕설을 퍼부어 좌중이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모 방송사의 한 간부도 “정 의원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중진 참모에게 지시사항 이행을 확인하다가 맘에 들지 않자 대신 옆에 있던 비서를 민망할 정도로 혼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부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장례식 때 수일밤을 새우며 고생한 비서진이 문상객 명단을 정리하던 중 한 의원의 당적을 잘못 적었다는 이유로 전원에게 시말서를 쓰도록 요구한 사실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때문에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겸손하고 예의바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가혹하다는 평도 나온다.

정 의원은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면 나 자신도 더 엄격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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