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美·日 인권외교…탈북자 망명행렬 국제파장 확산

  • 입력 2002년 5월 9일 18시 47분


《중국에 있는 일본과 미국 영사관에까지 탈북자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한국과 북한은 물론 미국-일본-중국 관계에 새로운 외교적 파장이 일고 있다. 북일 교섭과 중일 관계개선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로 일본은 고민 속에 복잡한 외교적 계산이 불가피하게 됐으며, ‘인권 파수꾼’을 자처하며 탈북자 문제에 훈수를 두어왔던 미국은 외교적 당사자로서 원론을 스스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일본의 고민과 속셈〓장길수군 가족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 무장경찰이 일본 총영사관에 무단침입한 사건은 일본에 탈북자문제가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케 해줬다. 또 이 문제의 처리과정을 통해 탈북자문제에 대해 ‘백지상태’나 다름없던 일본의 향후 방침을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중국 측에 강력히 항의하고 강제연행한 2명을 포함해 5명의 신병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인도적인 배려차원보다 치외법권지대를 ‘유린당한’ 데 대해 원상회복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일본 정부 일각에서는 중국 경찰이 미국 영사관에는 들어가지 않고 일본 영사관에만 침입한 것은 일본을 얕잡아 본 때문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고민은 적지 않다. 관련당사국인 한국 중국 북한의 기대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인도적인 배려를 요구하며 일본이 중국 측에 압력을 행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일본인 피랍의혹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인도적인 문제’라고 강조해온 일본으로서는 외면하기 어려운 압력이다.

하지만 일본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朗)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벌어진 중국과의 관계를 더 이상 악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게 본심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9월 중일수교 30주년을 앞두고 중국방문을 추진 중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그가 “그 나라 사정도 있고 하니 냉정하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한 것은 그 속내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최근 적십자회담을 통해 2년여만에 겨우 재개된 대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 이번에 망명이 성사될 경우 자국 공관을 통한 탈북자 망명이 잇따를 것에 대해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일본은 중국 무장경찰의 영사관 무단진입과 신병인도 문제에 대해 분리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무단 진입에 대한 중국 측의 사과와 해명을 얻어내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시험대에〓미국은 선양(瀋陽) 총영사관에 탈북자들이 8일과 9일 잇따라 진입함에 따라 탈북자문제를 당사자 입장에서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미국은 3월 탈북자 25명이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했을 때 “중국 스페인 등이 국제적으로 확립된 절차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기를 바란다”고 밝히는 등 그동안 중국이 탈북자들을 색출해 북한에 강제송환하는 것에 반대해왔다. 그러나 이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원론적인 입장 표명 수준이었다. 실제로 4월26일 베이징의 미 대사관에 진입한 2명에 이어 이번에 다시 들이닥친 탈북자들을 계기로 이제 미국은 보다 확실한 정책 수립이 불가피하게 됐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3월14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중국 내에서 증가하는 탈북자문제에 관해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한국과 중국 정부 및 미국의 비정부기구(NGO)가 탈북자문제를 우려하고 있으나 그 이상은 일반화해서 설명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헨리 하이드 위원장 등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9일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으로 전문을 보내 탈북자 강제소환 반대입장을 천명, 인도주의 차원의 처리를 호소했다.앞서 미 정부기구인 국제종교자유위원회는 6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국무부에 대해 중국이 탈북자들을 북한에 강제송환하지 말고 이들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등 탈북자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때문에 이번 탈북자 사건은 미 정부의 탈북자 정책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빌 클린턴 전 행정부에 비해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보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고 있고 탈북자문제는 그 같은 북한 인권문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추이가 주목된다.

미국은 일단 탈북자 3명에 대해선 제3국을 통한 한국행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도 미 외교공관을 탈북자들의 한국행 채널로 계속 허용할 것인지, 또 탈북자들이 미국행을 원할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은 속단하기 어렵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워싱턴〓한기흥특파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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