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이산상봉 돌연연기 배경과 파장]

  • 입력 2001년 10월 12일 20시 12분


《북한의 돌연한 이산가족 교환 방문 연기로 남북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북한은 연기 이유로 ‘남한 내의 정세’를 들었지만 이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남북대화는 계속된 전례가 있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른 일도 아니고 이산의 한(恨)을 풀어주기 위한 상봉 행사를 연기했다는 점에서 북한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더욱이 장관급회담이나 경협추진위 회의처럼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회담에는 여전히 관심을 보여 남북대화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다분히 이중적이 아니냐는 의심도 갖게 한다. 어쨌든 공은 다시 남측으로 넘어 온 감이 있다. 북측의 이 같은 회담 태도에 대해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다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벌써 “굴욕적인 대북 저자세로 인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더 이상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남과 북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향후 남북대화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북한

북한이 불과 나흘 앞으로 다가온 제4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을 돌연 연기하는 ‘제멋대로 식’의 행태를 또다시 드러냈다. 북측은 ‘남조선에 조성된 정세’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북측의 일방적 행태는 남북관계에 대한 악영향뿐만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북한은 역시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인상을 줄 것이 틀림없다. 북측이 이런 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산상봉 등을 연기한 배경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군부의 입장에 대한 배려 등 내부 이견을 정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풀이다.

금강산 관광대가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전력 등 대북 지원에 대한 남측의 확답이 없는 상태에서 이산가족 상봉 등에 응하는 것은 ‘양보’라고 보는 북한 군부의 불만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

또 북측이 미국 테러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등 나름의 성의를 보였음에도 북한에 대한 남한 및 미국의 시각이 ‘경계 일변도’로 흐르는 것에 대해서도 강경세력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세종연구소 이종석(李鍾奭) 연구위원은 “금강산대가 미납금 등으로 대남협상을 주도하던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의 입지가 약해지고 군부의 목소리가 강화되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군부를 다독거리기 위한 북한 수뇌부의 결정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전형적인 ‘실리 챙기기 전술’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이 △전력 등 각종 지원을 얻어낼 수 있는 장관급회담 △식량 지원을 위한 2차 경협추진위원회 △금강산대가를 위한 금강산 당국회담을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

동국대 고유환(高有煥·북한학과) 교수는 “당국간 대화는 지속해 실리를 챙기되 이산상봉 등 북한 체제에 영향을 미치는 행사는 보류하겠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또 ‘인색한’ 남측의 대북지원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시하며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산상봉 약속이 깨질 경우 경협추진위나 금강산 당국회담이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북측이 이런 ‘위험’을 무릅쓴 것은 현재의 남측 분위기를 볼 때 어차피 자신들의 기대치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남측의 미온적 태도에 강력한 경고를 보내면서 남북관계 악화에 대비한 명분도 쌓겠다는 속내라는 것이다.

고려대 유호열(柳浩烈·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5차 장관급회담과 금강산 당국회담에서 남한으로부터 기대한 것을 못 받아 불만이 많은 것 같다”며 “남측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영식·부형권기자>spear@donga.com

▼남한

정부는 12일 북한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등 민간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하겠다고 나서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다각적인 대책마련에 들어갔다.

특히 정부는 북측의 돌발행동에 대해 또다시 “언제까지 끌려만 다닐 것인가” “얼마나 더 퍼주어야 할 것인가”라는 등으로 국민 여론이 보다 악화될 것을 크게 우려하는 표정이었다.

북측의 연기 발표가 5차 장관급회담 및 1차 금강산 당국회담에서 경의선 연결 및 금강산 육로 개설 등에 대한 북측의 극히 무성의한 태도를 확인한 반면 남측은 식량 40만t 지원 구상을 밝힌 직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북측의 일방적 조치에 미온적으로 대응할 경우 남북관계에 대한 국민 여론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판단하고 이번 사태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입장을 정했다.

정부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담화가 나온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통일외교안보 분야 장관 오찬간담회 및 NSC 관련부처 실무자 간 전화협의 등을 통해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일단 정부는 북측에 남북 간 합의사항의 이행을 강력히 촉구하는 한편 북측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는 단호한 조치도 준비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북한의 이번 조치가 남북관계 자체를 단절하겠다는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했다. 당국간 회담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힌 데다 이산가족 상봉행사 등도 “남측에 좋은 분위기가 조성돼 조속히 이뤄지길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기 때문.

특히 북측이 이산상봉 행사 등을 연기한 것은 북측의 준비시간 부족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재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다만 북한이 각종 당국회담 장소를 금강산으로 하자고 요구한 데 대해서는 북측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고 남북간에 협의해 결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정부는 북측이 남측의 대북경계 태세 등을 계속 문제로 삼으면서 당국회담 장소도 금강산만을 고집할 경우 대북식량 지원 재검토 등 단호한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통일부 김형기(金炯基) 차관은 “대북전통문에서 이산가족 교환이 이행되지 않는다면 장관급회담 등이 개최되어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우려를 표명한 부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며 “식량지원 문제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식기자>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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