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평양 가는 길/평양고보 졸업생 김재전씨

  • 입력 2000년 5월 28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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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보를 나온 실향민 김재전씨(76·서울 홍제동 김재전의원 원장)는 요즘 부쩍 학창시절이 생각난다고 한다. 만수대 언덕 위에 우뚝 선 교정하며 대동강의 푸른 물, 그리고 친구들…. 남북정상회담 탓에 향수병이 도진 것일까.

김씨는 평양고보 32회(1944년 2월) 졸업생이다. 동기생 240여명 중 100여명이 월남했지만 지금은 40여명만 남았다. 다른 친구들은 망향의 한을 풀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떴다.

실향의 아픔을 무엇으로 달랠까마는 김씨에겐 작은 위안거리가 하나 있다. '32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기념' 앨범이 그것이다.

이 앨범은 졸업 때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는 일제의 물자통제가 극심해 앨범을 만들 형편이 못됐다. 이들은 월남하고도 20년이 더 지난 뒤에야 졸업앨범을 만들었다.

70년 어느 날, 김씨는 우연히 만난 동기생 허영수(許永壽)씨로부터 빛바랜 학창시절의 사진들을 보았다. 두 사람은 밤새 감회에 젖었고 이렇게 귀한 사진들을 혼자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해 졸업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기생들을 수소문해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진들을 모았다. 북녘에 있어 사진을 구할 수 없는 친구들은 단체사진에서 얼굴만 오려내 썼다. 옛날 사진을 채 간직하지 못한 동기생들도 있어서 그런 친구들은 나이 먹은 사진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1년 반에 걸쳐 동안(童顔)의 고교생과 40대 중년 남자의 얼굴이 뒤섞인 '늦깎이 졸업앨범'이 만들어졌다. 세상에 이런 앨범은 처음일 듯 싶었다.

평양고보는 이제 남아있지 않다. 당시 그들이 웅지를 키웠던 학교터는 '분수대공원'이 되었고 모교 건물 뒤뜰에 서 있던 한 그루 나무만이 남아 평양고보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평양의 명문으로는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있는 평양 제1고등중학교가 꼽히지만 전혀 다른 학교다.

"어디, 한번의 만남으로 동강난 반도가 이어지겠나. 그래도 평양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면 한이 없겠네…."

김씨의 바람이다.

<문철기자>full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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