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국정 피로감']정치-경제-사회분야 점검

  • 입력 2000년 5월 24일 22시 33분


▼정치분야▼

정치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이 지배적인 인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들어가면서 경제 사회부문에서는 어느 정도 개혁의 메스가 가해졌지만 사회 전반의 개혁을 끌고 가야 할 정치권은 국회의원 수를 299명에서 273명으로 줄인 것 외에는 달리 한 일이 없다.

국민은 ‘정치개혁’을 구두선처럼 외쳐 온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총체적 리더십에 대해서도 불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이 정말 마음을 비우고 정치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물론 정치란 상대가 있는 법이어서 대통령의 뜻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소속 당선자를 단숨에 입당시키고 자민련과의 공조복원을 도모하는 최근의 행태를 보면 김대통령이나 민주당 수뇌부도 결국은 ‘수(數)의 우위’를 통한 정국 주도권 장악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만하다. 여야간에 진행중인 인사청문회법 협상은 부진한 정치개혁 입법의 대표적인 예다.

여야는 2월 국회 임명동의를 필요로 하는 고위 공무원에 한해 인사청문회를 실시토록 했다. 그러나 정작 청문회절차를 정하는 ‘인사청문회법’은 제정할 노력도 않고 있다가 이한동(李漢東)총리가 지명된 뒤에야 부랴부랴 협상에 나섰다.

현 정부 출범과 함께 제정을 약속했던 인권법, 부패방지법은 15대 국회 회기가 끝남에 따라 폐기처분될 위기에까지 놓여 있다. 국가기관의 불법 감청 근절을 위한 통신비밀보호법, 검은 돈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자금세정방지법도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금품수수를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이 주도했던 정치자금법 개정도 정치권의 기득권 수호 논리에 막혀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경실련 이석연(李石淵) 사무총장은 “대통령 자신부터 다수 안정의석 확보와 정국 주도권에 집착하다 보니 야당의 공격대상이 되고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힘의 논리 보다는 진정한 개혁의지가 바탕이 돼야 국민의 지지를 받고 야당을 설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경제분야▼

외환 위기를 겪고 난 뒤 경제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금융’ ‘거시경제’ ‘외환거래’와 같은 용어만 나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애써 눈길을 돌렸던 주부와 학생들까지 경제 공부에 열을 올린다. ‘경제’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는데 최근에는 경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전문가들은 “지난 2년 6개월 동안 개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예전의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좌절감이 이 같은 현상을 부추겼다”고 분석한다.

▽위험 수위를 넘은 정부의 말바꾸기〓경제 피로증후군을 심화시킨 주역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실로 대표되는 정부 경제 부처. 같은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말을 하는가 하면 어제 얘기와 오늘 발표가 뒤바뀌는 현상이 되풀이되면서 국민의 경제불신을 심화시켰다.

공적자금 추가 조성 여부와 금융 구조조정 방향 등을 둘러싼 혼선이 대표적인 예. 이헌재재경부 장관은 4월 총선 전까지만 해도 공적 자금은 기존에 투입된 64조원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가 선거가 끝나자 “구조 개혁을 위해 필요하면 국회 동의를 받아 추가로 조성하겠다”고 번복했다. 반면 이기호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이달 초 “올해 추가로 들어가야 할 공적 자금은 40조원에 이른다”면서 “국회 동의 없이 조성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엇갈린 발언을 했다. 시장의 혼란이 커지자 재경부는 15일 “올해 금융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공적 자금은 20조원으로 국회 동의없이 조달할 방침”이라고 수정했다. 똑같은 사안을 놓고 재경부 금감위 청와대의 발표가 뒤엉키자 시장에는 “한국에는 경제를 다루는 정부가 적어도 3곳은 되는 것 같다”는 냉소적인 유행어가 퍼졌다.

▽후퇴하는 개혁〓선거를 전후해 정부 관료들이 즐겨 쓴 말은 “개혁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시장에 미칠 충격도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논리에 따라 내년초 실시 예정이었던 금융기관별 예금보험료율 차등화 조치가 슬그머니 무기 연기됐다.

이 제도는 금융기관의 신용도에 따라 보험료율을 달리 산정해 어떤 금융기관이 우량이고 어떤 곳이 부실한지를 시장에 정확히 알려 시장자율의 금융계 재편을 유도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것. 정부의 연기 방침은 시장에서 ‘금융 구조조정 의지의 퇴색’으로 해석됐다.

7월 실시 예정인 채권시가평가제의 연기론이 솔솔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 정부가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자 개혁의 대상인 금융권도 구조조정의 방향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몇몇 시중 은행장들은 “한국에서 합병을 해 성공한 은행이 있느냐. 기업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지금대로 가는 게 상책”이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헌재장관을 비롯해 앞장서서 금융 및 기업 개혁을 이끌어야 할 정부 당국자 스스로 개혁피로 증후군에 빠져든 것 같다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외환 위기를 극복했다는 섣부른 자만심이 퍼지면서 우리 경제의 고질적 병폐인 ‘정치 우위’ 현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재경부와 금감위는 총선 전 투신 부실 처리 등 각종 금융 구조조정을 선거가 끝난 뒤 실시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헌재장관은 “정부는 은행 합병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올해 안에 눈에 띄는 합병이 이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사자는 부인했지만 표를 의식한 발언이라는 해석. 한국투신 관계자는 “정부 정책이 경제 논리에 따라 진행돼 어떤 상황에서도 예측이 가능했다면 투자에 참고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면서 이런 것들이 쌓여 정부 불신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 증권사 직원은 “정치 일정을 이유로 정부 스스로 6개월 이상 개혁공백 상태를 만들어 놓고 뒤늦게 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성토했다.

▽따로 노는 시장과 정부〓이런저런 이유로 개혁이 지연되고 금융 불안이 확산되자 시장 안정을 위해 각자 소임을 다하면서 때로는 협력도 해야할 정부와 시장이 서로 반목하고 헐뜯는 관계로 치닫게 됐다.

정부 당국자들은 “실물 경제는 여전히 탄탄하다”는 점만 강조하고 “엄밀히 말하면 시장 불안이 아니라 시장참가자들의 불안일 뿐”이라고 폄훼한다.

당연히 시장 참가자들은 정부를 성토한다. 한 투신사 임원은 “정부 개혁의 가장 큰 문제는 실효성 있는 정책 수단 없이 말로만 모든 것을 다하려 하고 그나마 미적거린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금융감독원 검사만 11차례 받았지만 내용은 대부분 대동소이했다”면서 “검사받기에 지쳐 떠나는 회사 직원이 한둘이 아니어서 정상 업무를 못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박원재·최영해기자>parkwj@donga.com

▼사회분야▼

“몸이 아프면 7월부터 어디서 약을 구할지….”

최대 국정 과제인 의약분업이 의료계의 반발과 국민의 공감대 부족으로 7월1일부터 시행될지 불투명해지면서 국민은 불안하다.

개혁의 부작용인지, 개혁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인지 모르지만 이 불안감이 말끔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약도 없다.

의약분업안에 합의했던 의협은 ‘선진국형 완전 분업’을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와 집단 휴진을 강행했다. 이 바람에 환자들이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7월 국민건강보험법 발효에 따른 의료보험 통합은 그동안 준비 부족 때문에 이미 한차례 시행이 연기됐던 것. 이 과정에서 지역의보 노조는 반발하고 보험료가 급상승하는 사무직 근로자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국민에게 어떻게 난제들을 풀 것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 분야도 마찬가지. 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매듭이 그때그때 풀리고 다른 현안으로 넘어가야 하는데…”라고 푸념했다. 노사 양측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개혁이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

노사정위원회는 노동계의 불참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노동계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 지난해 논란을 일으켰던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의 경우 노사정위 공익위원 중재안을 가까스로 만들었으나 사용자측이 반발해 15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되기도 했다.

21세기의 새로운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구축한다는 ‘신노사문화’ 운동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노사 양측의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는 다시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고 정부는 “불법 파업에 단호히 대처한다”는 뻔한 대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냉소주의가 노동계 전반에 퍼져 있다.

교육계도 무력감에 빠져 있다. 교사들은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노를 토로하고 있으며 교육 행정가들은 ‘뭔가 개혁이 꼬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의 필요성은 있지만 이를 힘차게 추진하는 주체는 찾기 힘든 실정.

김대중정부 초기의 요란하고도 성급한 개혁이 교육계의 반발을 부르면서 개혁 정책이 무작정 늦춰지고 검토 단계에서 폐기되기도 했다.

교육부는 지난해 3월 교육 전분야의 개혁 청사진을 담은 ‘교육 발전 5개년 계획 시안’을 발표하고 지난해 5월까지 이를 확정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약속 시한을 1년이나 넘긴 현재도 여전히 시안으로 남아 있다. 또 학생들이 담임을 고르는 담임선택제, 교원을 평가하는 교원성과급제, 훌륭한 교사를 대상으로 한 참교사인증제 등 구두선으로 끝난 정책도 많다. 모두가 ‘교육 개혁’이란 말에 질린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빠듯한 주머니를 털어 학원비를 대는 학부모나 입시 지옥에서 헤매는 학생들에게 ‘개혁’은 ‘개악’으로까지 해석되는 실정이다.

서울대 박승재(朴承載)교수는 “교육 부문에서 단시일 내에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며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거친 지속적인 변화가 쌓이면 개혁이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송상근·정용관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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