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선자금문제는 따지고 보면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결코 여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한국당 李會昌(이회창)대표는 지난 1일 『대선자금에 대해 여야는 모두 당시의 상황을 고백하고 진실을 밝히는 기조위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92년 대선이 끝난 뒤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선거비용은 여야가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선거자금 규모가 여당에 비해 작다고 해서 야당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경유착과 「검은돈」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액수의 다과(多寡)에는 차이가 있지만 정치자금의 모금경로나 용처, 규모, 그에 따른 책임 등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지난 9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金大中(김대중)후보의 민주당과 鄭周永(정주영)후보의 국민당이 과연 대선자금을 얼마나 사용했느냐를 규명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여당에 비해 선거자금조달을 후보 개인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 조달 및 사용과정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대중후보의 경우 민주당 李基澤(이기택)총재가 지난 2일 제기한 「5백억∼6백억원 사용설」이 거의 유일한 주장이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측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선관위 신고액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에 남아 있는 92년 대선관련자료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대선 후 민주당이 선관위에 보고한 항목별 자금사용 내용은 파기됐는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세부항목의 출납장부는 아직도 민주당 사무처에 보관돼 있다.
이 장부에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후보가 50억원씩 세번에 걸쳐 경리국에 입금시킨 사실이 기록돼 있다. 또 그밖에 김후보가 수억원에 이르는 자금을 수시로 입금시킨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민주당의 기본적인 공식수입은 △국고지원금 78억원 △재정위원회 모금액 30억원 △특별당비 20억원 등이었다. 따라서 장부에 나와 있는 김후보의 개인조달자금과 당시 민주당의 공식수입만 합하더라도 3백억원이 넘는다.
이는 지구당지원과 유세 홍보 조직관리 등을 위해 세웠던 지출계획 규모와 거의 맞아떨어진다. 당시 민주당은 지구당지원금과 유세비용 등 공조직관리에 2백억원, 중앙당 홍보비 등에 1백억원의 예산을 잡아 놓았다.
당시 민주당은 각 지구당에 대선에 돌입하기 전에는 월 2백만원씩의 지원금을 내려보내다가 10월부터는 6백만원씩으로 상향조정했으며 대선 때까지 평균 6천만원이상의 「실탄」을 내려보냈다.
대선 때 선거자금관리의 주요 계선상에 있었던 현 민주당의 당직자는 『김후보가 개인적으로 지출한 지구당위원장 격려금과 「연청」 등 사조직의 운영비 등은 어떻게 구해서 어디에 사용했는지 당에서는 알 수 없었다』며 『이런 비공식자금 또한 엄청난 규모였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김후보는 당시 지구당에 내려갈 때마다 위원장들에게 1백만∼2백만원씩의 격려금을 줬다.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지원유세를 했던 이기택총재도 이 정도의 격려금을 내놓았다. 이총재는 돈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총재의 선거경비로 공식자금에서 수십억원을 별도로 산정했었다고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가 전했다.
연청은 김후보의 장남인 金弘一(김홍일)현의원이 주로 호남지역의 의원 등 재력가들에게 조달해 운영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런 저런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당시 김후보가 거둬서 사용한 선거자금은 선관위 신고액을 훨씬 상회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후보는 이런 경비들을 조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한 관계자의 증언.
『김후보는 정치자금을 구하기 위해 지방유세가 있더라도 밤에는 서울로 올라왔다. 김후보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으면 돈을 안준다. 주는 사람도 생색을 내기 위해서다. 당시 동교동 자택으로도 사람들이 왔었다.노출을 꺼리는 사람은 대리인을 보냈다』
그러나 權魯甲(권노갑)崔在昇(최재승)의원 등 가신출신들이 대신 호텔 등에서 후원자를 만나 돈을 받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후보가 의지한 또 하나의 「돈줄」은 대선 직전에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전국구 공천자들이 낸 「특별당비」. 당시 김후보는 8명의 전국구후보들로부터모두2백40여억원의돈을받아일부는총선 때 썼고 남은 돈은 대선에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국민당은 민주당보다는 살림이 상당히 풍족했다. 정주영후보가 국민당을사실상현대의외곽정당으로 만들어 현대와 국민당이라는 「이원체제」로 선거를 치렀기 때문이다.
92년 2월 창당 당시 사무처요원 70명 중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현대 직원들이었고 대선 직전의 사무처요원 6백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전히 현대 직원이었다. 당간부조직도 대동소이했다.
또 현대그룹은 「당원배가운동」의 일환으로 그룹내 전직원 17만명 그리고 직원 가족들까지 포함해 1백만명에 가까운 「현대가족」을 총동원했다.
이 때문에 선관위 신고액 2백20억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소한 3천억원 이상을 썼다는 것이 정치권의 추산이다. 정후보와 그의 가족들이 대선을 앞두고 3천억원에 가까운 주식을 매각한 것도 이런 분석을 가능케 하는 근거다.
당시 국민당 경북지역 지구당위원장이었던 한 인사의 증언.
『지구당 활동비로 최소 1천억원이 지출됐을 것이다. 지구당마다 홍보비 운영비 유세동원비 등으로 1억5천만∼2억원이 내려왔다. 내가 수령한 돈은 모두 2억원으로 5천만원씩 네차례에 걸쳐 내려왔다. 또 창당자금 3천만원은 별도로 내려왔다. 그밖에엘란트라1대와12인승 승합차 1대가 내려왔다』
정후보가 개인적으로 썼거나 현대그룹 차원에서 사용한 돈의 규모를 추정할만한 단서는 거의 없지만 여의도유세 등 큰 행사때마다 화제가 됐던 어마어마한 동원 규모를 감안할 때 그 액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 막바지에 터진 현대중공업비자금사건은 당시 대선과 정치자금간의 상관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당시 국민당소속이었던 야당 K의원의 증언.
『선거 막바지에 검찰의 계좌추적이 시작되자 지구당위원장들은 일제히 「돈세탁」을 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수표로 내려온 자금을 조금씩 나눠 여러 은행을 돌아다니면서 가명으로 현금화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최영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