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회고록 발췌5]노씨 주저…남편 『타이밍 중요』

  • 입력 1996년 12월 19일 08시 45분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통령후보를 사퇴하겠다』는 노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그분은 그날 직선제 수락을 고려하게 된 다섯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다. 첫째, 물리적으로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비상조치가 불가피하고 비상조치는 정권의 불명예 일 뿐 아니라 경제와 올림픽에 타격을 준다. 둘째, 야당이 선거 보이콧을 하면 단일후보가 되고 그것은 대외적 모습을 우습게 만들며 당선된다해도 불안한 집권이 된다. 셋째, 현행 간선제를 야당이 역이용할 경우 야당은 기습적으로 선거에 열기를 올릴 수 있고 직선제보다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물론 패배 가능성도 높다. 넷째, 설령 현행헌법으로 선거에 승리해도 89년의 개헌논의는 불가피하게 된다. 새로운 선거는 새 자금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경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다. 다섯째, 현행 간선제에 비해 직선제는 당선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당선 가능성을 더 높일 수 있다. 71년 선거가 실례로 등장했다. 그해 박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3선개헌을 한 뒤여서 인기가 없었다. 경쟁자인 김대중씨는 달랐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로 치러진 선거는 개표함을 열자 박대통령이 1백만표 이상 앞질러 당선됐다. 3선개헌, 인기하락의 치명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그당시 불리한 조건의 박대통령에 비하면 똑같은 직선제선거 앞에서 노대표의 경우는 다른 이유들로 훨씬 유리하다고 그분은 자신에 차 말했다. 『노대표에게는 우선 새 인물이라는 신선미가 있다. 박대통령과 비교할 때 외모와 언변도 좋다. 더구나 젖먹던 힘까지 쏟아낸 근면성과 그 어떤 정부도 갖지 못한 기적의 패기 때문에 5공이 나라에 바친 치적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익사직전의 나라를 인계받아 인공호흡을 거쳐 번영의 불꽃을 피우게 했다. 우리의 현대사속에 지금처럼 번영이 구체적으로 접근해온 시대는 없었다. 이것은 그저 얻은 행운이 아니다. 우리는 무조건 나라를 살리겠다는 운명같은 사명감으로 숨이 막혔었다. 이제 직선제라는 완전경쟁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생애 최고의 정신으로 이룩해 놓은 치적을 정정당당하게 평가받아 보는 것도 사나이답지 않은가』 열의에 찬 그분의 설명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중요한 변화가 왔다. 노대표가 그분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태표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노대표가 시간을 요청한 것은 옳았다. 노대표에게 던진 그분의 민주화 구상은 충격 혁명 도약 모험의 요소들로 탄탄하게 장전된 파격적인 그 무엇이었다. 시간을 요청한 노대표를 그분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분 대답은 짧았다.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두개의 불꽃이 바로 그시간 역사안에서 동시에 타오르고 있었다. 거리엔 시위라는 불꽃이, 권력의 핵심인 그분 내부에선 민주화라는 그 시대 최고의 이상을 위한 최고양보라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 두개의 불꽃이 있었던 그시절의 그 위기감이 좋다. 그시절에는 그 두개의 불꽃이 과연 위기인지, 진보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불꽃은 무조건 타올랐고 역사는 진보나 퇴보 중 한가지 길로 흘러갈 것이다. 허약하고 퇴폐한 사회라면 그 가슴에 그렇게 타오를 불꽃이 있을 리 없다. 지금 내게 그시절 그 두개의 불꽃은 보다 더 세련된 가치, 세련된 이상을 얻어내기 위한 그시절 우리사회의 젊음 생기 강함의 증명으로 다가온다.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노대표에게 그분은 긴 시간이 없다고 했다. “모든 영광 양보하겠다”민주화를 위한 그 충격적인 양보를 위해 그분은 이미 많은 시간을 사용한 뒤였다. 그분의 민주화 구상은 야당의 요구를 겨우 수용하는 소극적 규모가 아니었다. 한 팔로는 야당의 모든 요구를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민주화를 위해 치명적이었던 부분까지도 끌어안는 대담한 순교적 정치포옹이 그분 결의 속에 있었다. 그 결의를 야당의 반대나 거리 시위대에 내몰린 통속적 양보라는 취급을 받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 결심에 대한 그분의 자부심이었다. 그것은 반대나 시위에 내몰려 상대적으로 급조된 결정이 아니었다. 그분은 도리어 보다 더 다른 가치, 보다 더 다른 힘에 기쁘게 굴복하고 있다. 자기결심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때문에 그분은 노대표에게 모든 것을 가능한한 신속히 결정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저녁 그분은 노대표의 결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중요한 한마디를 던지고 있다. 『나의 이 민주화 결심은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것이다. 이 결심은 야당과 국민을 동시에 열광시킬 것이다. 이 역사적인 발표는 발표하는 순간, 바로 그 사람을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고 반대자들을 침묵시킬 것이다. 과연 누가 이것을 발표할 것인가.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승부의 선두에 설 것인가. 난 나라와 노대표 당선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돕고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난 모든 영광을 노대표에게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노대표에 대한 그분 최고의 우정이었을까. 이 일은 그날 저녁 안가에서 일어났다. 귀가했을 때 그분은 조금 취해 있었고 격앙돼 보였다. 절반의 긴장, 절반의 흥분이 그분 속에 가만히 섞여있었다. 그분이 가족을 불렀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그렇게 가족을 불렀었다. 『난 오늘, 참 중대한 결정을 했다』 음성은 상기돼 있었다. 중대한 결정이란 말이 나는 물론 그즈음 부쩍 동지같이 느껴졌던 큰 아이를 긴장시켰다. 『우리가족의 청원대로 직선제수락을 결정했다. 내 돌연한 제의에 노대표는 몹시 당황했다. 당황해하는 노대표를 보니 참 미안하더라. 내가 정치적으로 미숙해 계속 야당에 양보만 해오다가 이젠 그들이 원하는 것 이상을 다 주어버린 셈이 됐으니, 노대표는 안전하게 투쟁할 고지마저 날려버린 낭패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것이 모험적이고 혁명적이지만,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용기있는 선택엔 최고의 승리라는 최적의 보상이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盧대표에게 “反旗들라”그분은 다시 말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노대표에겐 이 상황들이 쉽게 느껴질 리 없다. 그래서 난 노대표의 당선을 위해 이 결정이 가져올 모든 영광, 찬사, 이익, 부가가치, 전리품을 아낌없이 주기로 결심했다』 『모든 영광을 노대표에게』 그것이 그날밤 우리가족이 그분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가장 충격적 메시지였다. 노대표에게 영광을 양보하는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용기와 신선한 충격으로 가득찬 그분의 모든 결정들, 훗날 「6.29선언」이라고 불리게 될 어렵고 가치있는 모든 결정들은, 그날 이미 그분의 손에서 노대표의 손으로 그렇게 뜨겁게 옮겨지고 있었다. 『난 노대표에게 그 민주화구상을 내게로 가져와 내게 반기를 들라고 했다』 어느날 노대표는 그 결정을 휴대하고 그분을 찾아와, 그것이 민주화조치를 위한 노대표의 구상이라고 건의한다. 그는 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대통령후보는 물론 모든 공직까지 사퇴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해온다. 그분은 이미 4.13조치에서 직선제수락을 거부하고 호헌을 주장한 뒤였으므로, 직선제수락과 그 이상의 파격적 민주화요구를 해오는 노대표의 건의와 좋은 대조를 이룰 것이다. 말하자면 그분은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거부하는 통속적인 현상유지자의 표본으로, 그리고 바로 그분이 고통과 용기로 만들어낸 민주화를 위한 파격적 결정을, 바로 자신의 구상이라고 들고와 강력하게 건의하는 노대표는,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 적절한 불꽃을 던지는 영웅의 표본으로, 그렇게 배역이 결정되고 있는 셈이다. 한사람은 새 영웅의 배역을 우정의 선물로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새로 만들어지는 영웅에게 빛을 보태기 위해 악역을 자청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민주화에 열의가 없는, 안일에 빠진, 시대정신에 뒤진, 통속적 보수주의자로서 치명적인 악역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노대표 당선을 위해 노대표에게 모든 영광을 양보하기로 결정한 그분의 선의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란 말인가. 최초의 평화적정권교체가 그분 의지로 이미 시작된 이상, 왜 또 이런 식의 치명적이고 현기증나는 정치시나리오가 다시 필요하단 말인가. 명예로운 하산이 필요한 시기에 왜 하필 악역을 자청해, 조작된 불명예를 끌어안아야한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그분의 품성과 민주화에 대한 그분의 용기가 한꺼번에 왜곡당한다는 것이 내겐 견딜 수 없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이란 따로 있는 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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