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 日 리쓰메이칸대 석좌교수 “日 식민지배 성심껏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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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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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傷으로 남은 재일동포 비극… 서승 日 리쓰메이칸대 석좌교수 건국대 강연

서승 일본 리쓰메이칸대 석좌교수가 26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건국대에서 열린 ‘코리안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 심포지엄에서 재일동포의 고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건국대 제공
서승 일본 리쓰메이칸대 석좌교수가 26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건국대에서 열린 ‘코리안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 심포지엄에서 재일동포의 고난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건국대 제공
서승 일본 리쓰메이칸(立命館)대 석좌교수(67)가 강단에 들어서자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서 교수의 얼굴은 온통 화상투성이였다. 1971년 국군 보안사가 서 교수를 재일동포학원침투간첩단사건의 주모자로 모는 데 저항해 기름 난로에 몸을 던져 생긴 흉터였다. 서 교수는 26일 서울 광진구 자양동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주최로 열린 ‘코리안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 심포지엄에서 자신의 온몸에 화인(火印)으로 새겨진 재일동포의 고난에 대해 강의했다.

서 교수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교토(京都)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났다. 한국어 한마디 할 줄 몰랐던 그를 일본인들은 조센진(조선인)이라고 낮춰 부르며 따돌렸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인의 분노가 재일동포를 향한 것이다. 서 교수는 일본인과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은 옷을 입어도 ‘식민지 2등 국민’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했다.

1965년 한일 정부가 국교 정상화 협약을 체결하며 동포 사회가 들끓자 정체성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일본 정부는 동포를 한국 국적과 조선 국적으로 나누고 선택을 강요했다. 서 교수는 일본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떠나 스물셋 되던 1968년 서울대로 유학을 왔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고국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서 교수는 동생 서준식 씨와 함께 간첩으로 몰려 19년간 옥살이를 하게 됐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은 북한에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재일동포를 간첩으로 몰아 대학 내의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때 사건에 연루됐던 이들 상당수는 훗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 교수는 옥중 생활에서 힘없는 개인이 역사의 희생양으로 고통받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됐고 출소 뒤에는 국가에 의한 폭력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서 교수는 “분단과 식민의 과거사를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말하고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식민지 시대에 대해 성의 있게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 교수의 강연에 이어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는 김종군 교수 등이 ‘한국인의 역사적 트라우마와 치유’에 대해 강의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서승#리쓰메이칸#건국대#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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