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28>박정희 이승만 대통령과 정화운동

동아일보 입력 2011-12-09 03:00수정 2011-12-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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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 참가한 각국 불교 지도자들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기념촬영을 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육(六) 비구 할복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정화운동에 대한 비구들의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군부는 모든 혼란을 사회악으로 규정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종권과 사찰 관할 문제로 폭력사태까지 초래했던 정화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담, 경산 스님 등 당시 정화운동을 주도했던 지도부는 군사정부의 냉정한 태도에 당혹감을 느꼈다. 종단은 1961년 6월, 5·16 후 처음으로 종회를 개최해 정화 촉진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혁명 세력에 적극 협조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불교신문 사설이다.

‘군사의 혁명이 국민의 정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요, 승려의 정화가 역시 국민의 정화요 사찰의 정화가 곧 국가의 정화인 것이다. … 혁명의 근원이 불교의 정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사찰의 청정과 함께 승려는 독신으로 청정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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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은 나아가 불교 정화운동은 단지 불교 내부에 그치지 않고 국민성을 계도하는 도덕운동과 직결되므로 국가 혁명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는 의문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혁명정부는 초법적인 권력이었다. 게다가 정화운동은 비구 300명이 대처 7000여 명과 맞서는 것으로 시작한,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싸움이었다. 대처승들은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의 관계였다. 종단에서는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비구니 덕수 스님이 박 의장의 장모 이경영 씨(법명 대각화)를 어머니처럼 모셨다. 이 씨는 사위가 5·16을 일으키자 개운사로 찾아와 불공을 올렸고, 이를 계기로 덕수 스님과 가깝게 지냈다. 스님은 속가 언니도 함께 출가한 자매 비구니였다. 청담, 경산 스님이 진정서를 쓰거나 종단의 입장을 정리하면 덕수 스님의 손을 거쳐 이 씨와 박 의장에게 전달했다. 개운사를 다니던 육영수 여사도 남들의 이목이 우려된다며 사찰을 소개받아 도선사의 청담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다.

청담, 경산 스님 등은 박 의장 등 권력 핵심부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화운동의 대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 의장 일가의 적극적인 도움이 정화운동에 기여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당시 비구 측에 불리하게 전개되던 대처 측과의 소송까지 모두 취하시켰다. 박 의장 일가의 태도가 비구 측에 우호적으로 바뀌자 정부 측 인사들도 직간접으로 정화운동에 힘을 실어줬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정화운동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지만 삼각산 문수사, 경국사를 자주 찾는 등 불교와의 인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종교에 관계없이 성직자는 청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승려도 독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대통령이 충남 논산 관촉사와 경기 광주 장경사 등 대처승이 관리하는 절을 방문했다가 아이 빨래가 걸려 있는 등 어수선한 사찰 분위기를 보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1954년 5월 발표된 이 대통령의 담화 요지는 ‘교단과 사찰은 독신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 담화는 실제 정화운동 과정에서 큰 힘이 됐다.

1962년 3월 25일, 우여곡절 끝에 비구와 대처가 합의한 종헌(宗憲)이 확정 공포됐다. 종단의 이름은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종조(宗祖)는 도의국사로 확정했다. 양측이 합의해 종단을 출범시켰으므로 통합종단으로 불린다. 종정은 효봉 스님(비구), 총무원장은 임석진 스님(대처)을 선출했다. 종단은 4월 11일 정식 출범했다.

현재의 시각에서 정화운동이 지나치게 권력에 의지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정화운동을 둘러싼 역사적,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칠 것이다. 그만큼 비구의 입장에서 이 싸움은 명분만 갖고 시작한 처절한 과정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9>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통합종단의 갈등과 태고종 창종을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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