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에서 60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어르신 큰소리 지르기 대회’가 처음 열렸다. 17명의 참가자는 “영감, 사랑해” “얘들아, 외식 좀 자주 하자” 같은 개인사부터 “월급 좀 올려 달라” “말로만 경로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라” 같은 뼈있는 얘기까지 5초간 외쳤다. 사진 제공 송파구
무대 위로 올라온 김청자 씨(68·여)가 수줍은 듯 인사했다. 관객들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쳐다봤다. 심호흡을 하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3. 2. 1….
“영감! 사랑해애애애….”
소리는 귀가 찢어질 듯 크게 울려 퍼졌다. 김 씨가 무대에 올라간 시간은 5초뿐이었지만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관객들은 “진짜 우렁차네”라며 환호했다. 김 씨의 목소리 크기는 104dB(데시벨). 수많은 남성 참가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
김 씨는 6일 오전 10시 반 서울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에서 열린 ‘어르신 큰소리 지르기 대회’에 참가했다. “영감 사랑해”는 올해로 결혼 50주년을 맞아 여덟 살 많은 그의 남편을 향해 외친 것이다. 결혼 50년 만에 사랑 고백은 처음. 대회 시작 전만 해도 그는 남편에게 “오늘 내가 뭘 하니까 그냥 와서 보라”며 얼버무렸다.
○ “소리 지르니 속이 후련”
그러나 무대에서 내려온 김 씨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50년 만의 고백을 참 후련하게 했다”며 웃었다. 그의 남편은 말없이 흐뭇하게 김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큰소리 지르기 대회는 송파구가 주최한 경로의 달 행사 중 하나로 올해 처음 시작됐다. 만 65세 이상 노인들이 살면서 느끼는 스트레스, 하고 싶은 말 등을 5초간 크게 말하는 게 프로그램의 내용이다.
사람들 많은 데서 누가 힘들게 고함을 지를까. 하지만 반응은 예상외였다. 지난주 열린 예선전에는 40명 가까운 송파구 거주 노인들이 참여했다. 구는 정상 혈압(80∼120)의 참가자들 위주로 예선 심사를 했다. 그러나 혈압이 150이나 되는데도 “꼭 나가고 싶다”며 5번이나 재측정한 노인도 있었다.
본선 무대에 참가한 노인들은 모두 17명. 5초 동안 외친 이들의 말속에는 다양하고 애틋한 내용이 녹아 있었다. 사랑 고백부터 “우리 이제부터 시작이야”, “노장은 살아있다” 같은 건재 과시, “외식 좀 자주 하자” 등의 투정 등 다양했다. 진지한 내용도 있었다. 전직 고교 교장 출신의 이도화 씨(82)는 “버릇없는 요즘 아이들 바로잡으려면 집중하기와 정신 차리기부터 시키자”며 “열중 쉬어! 전체 차렷!”을 외쳤다. 공무원 퇴직 후 환경미화원으로 활동 중인 김희묵 씨(77)는 “힘들게 일하는 노인들 수고비가 8000원뿐”이라며 “용돈 좀 많이 줘라!”라고 외쳤다.
○ 쓰러져도 외치고 싶은 그들
이날 1등은 아들과 며느리를 향해 “얘들아, 손자 키우기 힘들다”라고 외친 김용석 씨(73)가 차지했다. 소리 크기는 무려 106dB. 퇴직 후 맞벌이인 아들 부부의 손자를 돌보는 김 씨는 “아침에 밥 먹여 유치원 보내는 데 1시간이 걸린다”며 “손자 키우는 게 얼마나 고달프면 우승까지 했겠느냐”고 웃었다.
행사를 기획한 안재승 송파1동 주민생활지원팀장은 “자식 눈치, 며느리 눈치 보느라 말도 잘 못하는 동네 어르신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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