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명인의 술 이야기]<4>민속주 안동소주 조옥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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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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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비법, 며느리에 전수”

조옥화 명인(오른쪽)이 아들, 며느리와 함께 ‘민속주 안동소주’ 제조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이권효 기자
조옥화 명인(오른쪽)이 아들, 며느리와 함께 ‘민속주 안동소주’ 제조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이권효 기자

《‘이 풍진 세상을,
아모리 아모리,
저 세상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해도,
때없이 맞닥치는,
겨울비 같은 좌절과 낭패를,
들켜지고 마는 굴욕과 수모를,
불싸질러 흔적없이 사루어주는,
45도 화주(火酒) 안동소주,
사나이 눈물같은,
피붙이의 통증같은,
첫사랑의 격정같은,
내 고향의 약술 그 얼로 취하여,
이 풍진 시대도,
저 시대의 너털웃음 웃어가며,
성큼 성큼 건너뛰며 나 살으리.’
경북 안동 출신의 한 여성 시인은
‘민속주 안동소주’의 멋과 맛을
이렇게 예찬했다.
어떤 깊이 때문일까?》

기자가 최근 경북 안동시 수상동 ‘민속주 안동소주’ 공장을 찾았을 때 기능보유자(한국전통식품명인 20호, 경북 무형문화재 12호) 조옥화 씨(87·여)는 마침 제조방법을 견학하러 온 안동대 식품영양학과 학생 20여 명 앞에서 아들, 며느리와 함께 쌀과 누룩으로 안동소주를 빚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평생을 안동소주와 함께 사셨는데 어떤 마음인가요?”, “왜 45도 술이죠?” 같은 질문을 했다. 조 씨는 “술도 음식인데, 음식은 정성이고…. 제일 담백하고 개운한 느낌을 주는 상태가 45도여서 그렇지요”라고 답했다.

‘술도 음식이고 음식은 정성’이라는 조 씨 말은 제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저 좋은 술 한 가지를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삶이 녹아있다. 할머니를 보면 여러 가지 음식이 잘 차려진 상 위에 안동소주 한 병이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동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한 1990년부터 ‘민속주 안동소주’ 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우리음식연구회장’을 비롯해 ‘궁중음식연구원 이사’, ‘성균관 여성유림회 예학연구원’ 같은 일을 지금도 한결같이 하고 있는 모습이 그 징표이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생일상을 차린 주인공도 바로 조 씨였다. 대한주부클럽이 2001년 그를 ‘33회 신사임당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머니는 말이 별로 없다. “안동소주가 왜 좋은 술이냐. 좀 과음해도 뒤끝이 없느냐” 같은 질문은 어색하다. 누룩과 지에밥을 어떻게 만들어 어떤 비율로 섞으며, 불의 세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를 할머니에게서 직접 듣기는 어렵다. 그의 삶을 몇 마디 파편 같은 물음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기껏 쌀 80kg 한 가마니로 70병가량을 만들 수 있고, 연간 20만 병가량을 생산한다는 정도이다. 민속주 안동소주는 공장의 지하공간 발효실에서 만드는데, 이곳은 오직 할머니와 며느리만 들어갈 수 있다. 조 씨는 “안동소주는 이제 우리 며느리한테 물어보면 되는데…”라고 한다.

며느리 배경화 씨(57)는 시어머니의 소주 만드는 기술 뿐 아니라 그의 삶도 닮으려고 한다. 서울에 살던 배 씨는 1997년 안동으로 내려와 민속주 안동소주를 계승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안동대에서 안동소주를 주제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쳤다.

지난해 받은 박사학위 논문은 ‘민속주 안동소주 발효의 양조학적 특성 규명 및 자가 누룩 제조의 최적화’였다. 이후 안동소주 누룩의 발효 특성에 관한 논문을 학회지에 발표하기도 한 배 씨는 “시어머니의 평생 정성을 보면서 단순히 기술을 계승하는 것을 넘어 문헌적인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동소주의 전래 과정을 연구한 석사논문에서 그는 안동소주의 유래를 기존의 고려시대에서 9세기 신라시대까지 더 올라가 1200년 역사로 재정립했다. 전통궁중음식을 연구하는 것도 시어머니를 닮았다.

배 씨는 1999년 민속주 안동소주의 기능후보자로 지정됐다. 남편 김연박 씨(63)는 기술적인 소프트웨어는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드웨어 부분에서 안동소주의 발전을 고민하고 있다.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아건설 이사를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온 김 씨는 2000년 ‘안동소주박물관’을 개관했다. 공장과 나란히 있는 박물관은 안동소주와 안동의 전통음식 체험장과 시험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종 음식과 자료 등 66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김 씨 역시 안동대에서 올해 2월 ‘향토산업으로서 민속주 안동소주 육성 방안’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할머니는 “아들보다 며느리가 든든하다”고 했다. 사진을 좀 찍자는 기자의 부탁에 할머니는 며느리의 한복 옷고름을 바르게 고쳐주면서 “우리 며느리가 더 나은 소주를 만들기 위해 늘 공부해서 정말 기분이 좋지”라고 했다.

안동=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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