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준교수 “지식인들, 서구잣대 안맞는다 현실에 화풀이”

  • 입력 2006년 8월 22일 20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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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를 '성난 얼굴로 돌아보기'에 급급한 지식인들에게 차분한 자기반성을 촉구해 화제가 된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나남출판)의 저자 권태준(정책학)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서구이론이란 교과서에 맞춰 해석하고 행동해온 지식인의 행태를 비판했다.

"서구의 이론이라는 게 알고 보면 서구의 역사적 산물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놓은 겁니다. 지금 한국 지식인의 태도는 이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고 화풀이를 하는 거나 같아요. 서구 선진국이 수백 년에 걸쳐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뤄놓은 것을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국가에서 한두 세대 내에 이루면서 그 이론에 맞춰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는 지식인들이 과거엔 신생국의 대중이 소화하기엔 너무 벅찬 이론을 떠들다가, 지금은 그 이론들이 무력화한 세계화시대임에도 여전히 이론에 따른 노선투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비판이 더욱 매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한국사회를 설명하려는 수많은 이론들이 빠진 함정을 지적하며 한국현대사를 독자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신생국 대한민국은 서구 근대국가 성립과 달리 강력한 왕조권력을 중심으로 한 중상(重商)주의 국가와 민족국가 형성의 전력(前歷)을 거치지 않았음에 주목했다.

"게다가 우리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추구한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다종족·다민족 초강대국인 미국의 후견아래 있었기에 민족주의를 공식정치규범으로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민족을 대신해 남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북에서는 무산계급의 해방이 공식이념이 됐습니다."

이러한 공식이념은 민족의 개인화(자유주의)나 계급적 분화(사회주의)라는 역사적 단계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민의 생존이 가장 중요했던 신생국에게 이런 공식이념은 사치스런 것이었다.

"50~60년대 시대적 과제는 생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능력의 배양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군대식 규율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관료조직을 국가운영에 도입함으로써 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권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가 지지를 받았던 것은 대한민국이 건너뛰었던 중상주의와 민족주의 노선을 충족시켜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산업화경로는 중상주의 노선과 20세기 후반의 세계시장논리를 타협시킨 '의제(擬制) 자본주의'였다는 권 교수의 결론은 여기서 도출된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상당기간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것은 개인화나 계급화의 단계를 거치기 전 민족공동체의 열정을 '함께 잘살기'라는 형태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개발독재의 성공은 역설적으로 '함께 잘살기'라는 국민적 기대를 와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력이 앞장 서 산업화를 추동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선택과 집중'의 논리가 정경유착과 지역차별을 낳았고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민족공동체의 균열을 낳았다는 것이 권 교수의 해석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개인화나 계급화의 산물이 아니라 지역갈등의 산물로 봐야한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도 노동자나 자본가의 계급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반면 지연과 학연 같은 연줄과 연고가 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권 교수는 현실과 유리된 정치담론이 설득력을 상실하면서 정치가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문화정치'의 확산을 낳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인터넷시대와 세계화시대에서 사람들의 성향은 비항상성과 비정형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으로는 좌우나 보수진보를 말하면서 실제 정책은 이와 무관하게 대중의 카타르시스 해소를 최우선으로 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권 교수는 특히 세계화는, 서구나 제3세계 국가 모두에게 전에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저마다의 문화적·역사적 경험을 살려서 적응할 수밖에 없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한국이 어서 자신의 독자적 발전경로를 인식하고 실용적 노선으로 전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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