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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31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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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복원사업의 총지휘자격인 도편수(궁궐 대목수) 신응수(申應秀·58·중요 무형문화재 74호보유자)씨의 새천년 각오는 남다르다.
14세기말에 처음으로 지어진 뒤 전란과 격동의 와중에 파괴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해온 조선의 정궁이 조선조 ‘궁궐 목수’의 유일한 계승자인 신씨의 손을 거쳐 21세기 ‘천년 궁궐’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지난해 조선조 왕세자의 처소인 동궁 복원을 마쳐 강녕전(康寧殿·왕의처소)과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처소)까지 궐내 주요건물을 모두 되살려냈다.
올해 흥례문 복원작업을 마무리하면 30경비단 자리에 들어설 태원전(泰元殿·국상을 당했을 때 사용하는 빈전)을 복원하고 경회루도 보수하는 일이 남았다. 그리고 일제가 주축선을 틀어놓은 광화문을 원위치로 옮겨놓는 ‘화룡점정’이 끝나는 2009년엔 경복궁이 조선왕조를 뛰어넘은 우리의 왕궁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필생의 역사(役事)로 여긴 이 사업을 포기하려고 했을 만큼 시련을 겪었다. 감사원은 지난해 8월 ‘경복궁 복원작업에 국산 소나무가 아닌 수입목이 30% 가까이 쓰였으며 기둥목재의 60%에서 최대 1.4㎝폭의 틈새가 발견됐다’고 복원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해 난처한 지경에 몰렸다.
대들보에 필요한 수령 350년된 국산 소나무를 구하다 못해 북미산 미송을 썼지만 전체 목재의 1.3%로 최소화했고 육송이 갈라지는 현상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그의 해명은 비판여론에 묻혀버렸다.
흥선대원군 때 경복궁 중건을 책임졌던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의 적통을 이은 조원재(趙元裁)·이광규(李光奎) 양대 스승을 모두 사사한 그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10년 세월 태백산맥 줄기줄기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거둬들인 목재들까지 모두 팔아치우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일손을 놓은 지 4개월여. 새해를 불과 보름 앞두고 그는 다시 대패를 잡았다.
지난 9년의 세월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2009년까지의 계약기간 때문만도 아니었다. 신씨에게 경복궁 복원은 수백년의 시간을 이어온 조선 목수의 불멸의 혼을 되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