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씨 인터뷰]『대통령 첫째덕목은 건국이념 계승』

  • 입력 1997년 9월 2일 20시 12분


《「노익장(老益壯)」이라는 말이 이철승(李哲承)전 신민당당수(아호 素石·소석)처럼 어울리는 경우도 흔치 않다. 겉모습으로나, 힘이 넘치는 언변으로나, 왕성한 사회활동으로나 소석에게서 일흔 다섯의 나이는 느끼기 힘들다.

현재 지닌 직함만도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공동의장, 서울평화상 문화재단 이사장,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등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랄 정도다. 절도있는 생활, 세심한 건강관리 등이 그 원천임은 물론이겠지만 「소석의 노익장」을 지켜주는 가장 큰 비결은 아마도 일생을 통해, 또 오늘까지도 줄기차게 한 가지 「이념과 소신」을 추구하고 행동하고 나름대로 결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력」이 아닐까.

2일 서울 신문로 사무실에서 기자와 마주한 소석은 첫 질문도 꺼내기 전 「무려」 한시간 동안 말그대로 열정적으로 그 「이념과 소신」의 총론을 토로했다.》

▼대담=이도성 정치부차장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이념적으로 진공상태, 무중력상태예요. 이런 판에 7룡이고 8룡이고 무슨 의미가 있나요. 우리 건국 원로들은 해방후 혼란상황과 6.25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지킨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제 밥술깨나 먹게 됐다고 집안 어른들을 이렇게 무시해서 되겠습니까. 내 자신 앞장선 해방후 반탁 반공운동은 실로 3.1운동에 버금가는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지 못해 미완성 독립운동으로 끝났어요. 그래서 이를 완성해야 겠다는 뜻에서 건국세력, 6.25 참전 호국세력들을 규합해 자유민주민족회의를 조직한거예요. 이승만대통령이 독립촉성국민회의를 조직했듯이 민주통일을 위해 통일촉성국민회의를 조직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민주통일이에요. 마지막 독립운동이지요. 그러나 나라는 자꾸 딴 길로 가는 것 같아 밤잠을 못이룰 지경이에요.

냉전구조가 무너졌네 뭐네 하면서 안보 사상을 무시하고 흥청망청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 오늘의 상황 아닙니까. 북한은 한손에는 무력도발, 한손에는 적화통일의 깃발을 들고 한치 변함없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것이 망실돼가고 있어요. 천격(賤格)정치만 되풀이 되고 국가의 기본틀을 무시하고 망각한 정치인들만 판을 치고 있습니다. 1세기 전 「구한말」처럼 「신한말」이 오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맞은 매도 아프지만 앞으로 맞을 매가 정말 걱정입니다』

▼ 「역사세우기」 日帝 청산부터 ▼

답답함 섭섭함 야속함 등이 복잡하게 얽힌 소석의 열변은 급기야 『50년이 지나도록 북한이 식량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고 비웃을 일이 아니라 50년이 지나도록 건국정신 하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도 돌아봐야 한다. 북한도 망하지만 우리도 망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극단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소석 특유의 육두문자를 섞은 전방위 난사(亂射)가 시작됐다.

『진정한 「역사 바로세우기」는 일제와 2차대전 전후처리부터 똑바로 해야 돼요. 이 지구상에 우리처럼 이런 국가정책이 전무한 나라가 또 있습니까. 사할린, 일본군위안부, 731부대, 한일협정 등 무엇하나 제대로 마무리된 게 있습니까. 일본 독일은 침략자인데도 징용 유해 유가족 등 모든 것이 다 처리됐어요.

지지난해 광복 50주년을 맞을 때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뤄져야 했는데 거꾸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에 건국이념을 훼손하는 인사들이 끼여들었어요. 물론 정부 책임이지요. 내년에 맞을 건국 50주년 행사를 위한 예산도 없는 걸로 압니다. 그 뿐입니까. 4.19, 5.18 유공자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되는 판인데 반탁운동을 했던 건국세력들은 그 흔한 훈장하나 안줍니다. 말하자면 할애비만 있고 애비는 없는 격이지요』

―과거 군사독재시절에는 그렇다치고 가까운 사이인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는 얘기를 해보시지 그랬습니까.

『얘기했지요. 김대통령에게 「어느 나라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심지어 「친북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는 거냐」고 다그치기도 했어요. 그러나 김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집권하자마자 사상검증이 안된 주변의 이상한 사람들을 요직에 배치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건국이념 망실을 보다못해 우리 늙은이들이 나서서 대충 몰아내긴 했지만…』

▼ 6.25 전란이후 최대의 국난 ▼

―지금 대선전이 한창인데 다음 정권에서는 좀 나아질 것 같습니까.

『지금 대통령하겠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을 하겠다는 것인지 분간이 안가요. 대통령이 지녀야 할 첫째 덕목이 건국정신의 계승입니다. 건국의 정통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해요. 그러나 요즘 대선판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애는 버리고 태만 주워다 키우는 꼴」이에요. 흔한 말로 정치의 「몸통」은 없고 「깃털」만 있는 것 같습니다.

TV토론 백번하면 뭐합니까. 몇달전부터 벌써 몇 순배나 돌았습니까. 내가 보기에 TV토론은 대통령의 자질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탤런트 뽑는 경쟁같아요. 지금 우리는 안보 사상 경제 정치 등 4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6.25 전란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할 정도예요. 그런데 요즘 대선후보 TV토론을 보면 한반도 주변정세, 안보, 4강관계, 김정일 정권에 대한 대책,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쌀문제, 이미 만들어진 북한핵문제 등 국가의 기본틀에 관한 운영관리 문제는 거의 심층 논의되지 않는 것 같아요. 민생우선이라고 하지만 그것처럼 중요한 민생이 어디 있습니까』

소석이 정치판을 떠난 것은 지금부터 10년 전인 88년 13대 총선에서 고향인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낙선한 때였다. 그 후 그는 정치판을 다시 기웃거리지 않고 건국이념 세우기 활동에만 전념해왔다. 그러나 스스로 『지금도 「큰 정치」 「광의의 정치」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석의 현실정치판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 반체제인사 요직 기용 문제 ▼

『근본적으로는 정치가 문제예요. 국회는 수서라는 피라미를 한보라는 고래로 키워 배를 갈라놓았어요. 그런데 맹장을 떼든지 심장을 수술하든지 할 일은 제쳐두고 갈라놓은 배를 봉합도 안한 채 대선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내가 몇달 전 김대통령을 만나 얘기도 했지만 현정국을 비상시국으로 선언하고 「구국비상국민회의」를 구성해 현안인 대선문제 노사문제 정치자금법 등을 신속히 처리하고 돈안드는 선거 풍토를 정착시킨 후 대선을 치르자는 겁니다.

지금 정치권에서 정치개혁입법 얘기하는데 악순환의 방정식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세 김씨 모두 정경유착의 고리에 얽혀있는데 무슨 개혁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선배들이나 나나 정치 그렇게 안했어요. 인촌 해공 유석선생 모두 주머닛돈 털어 정치하고 당운영했지 지금처럼 노태우 돈이든 누구 돈이든 마구 받아 정치하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좌지우지하는 정치판에서 무슨 개혁이 되겠느냐는 얘기예요. 창궐한 병을 지닌 채 대선을 치르면 후유증이 심각할 겁니다. 옥동자가 아니라 만신창이를 분만하는 대선이 될 것이 분명해요. 결선투표도 없이 20%, 30% 짜리 대통령이 어떻게 4대 위기를 짊어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정치판을 신랄하게 질타하던 소석의 얘기는 이른바 「3김정치」와 「한총련」 문제로 옮겨갔다.

『한총련은 일조일석에 성장한 게 아닙니다. 또 젊은 애들 욕할 것도 없어요. 역대 대통령이나 야당지도자라는 사람들이 6.25때 3백만을 죽인 전범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자고 안달을 하지 않나, 건국이념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 있나, 국민윤리 과목도 없어지고 국가고시에서 국사과목이 사라지지 않나, 그저 태백산맥 모래시계같은 것이 젊은이들의 정신적 논산훈련소가 돼버리는 판에 학생들이 제대로 클 수 있겠습니까.

지난 87년 고려대에서 한총련의 아버지 격인 전대협이 발대식을 할 때 양김씨가 격려사를 한 것은 다 아는 일 아닙니까. 그 뒤 학생운동권 민중당 등 출신들을 경쟁적으로 정치권에 끌어들인 사람들이 누굽니까. 아무리 급해도 반정부인지, 반국가인지, 반체제인지는 알고 끌어들여야 할 것 아닙니까. 현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분이 한때 급해서 반국가세력들과도 손을 잡았었다고 실토하더군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그 중 한 김씨는 「95년에는 공화국연합이 된다」 「유엔에 남북한이 단일의석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등 마치 통일 전문가처럼 행세도 하고 있어요. 그러나 우리같은 진짜 전문가 눈으로 보면 모두 상식에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아무튼 보수의 의미는 건국이념이에요. 용어구사전술로 보수다 진보다 해서는 안됩니다』

▼ 지역감정 原爆보다 피해 커 ▼

―정치를 아편에 비유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답답하시면 어떤 형태로든 다시 현실정치에 관여해보지 그러십니까.

『나더러도 (대통령선거에) 나서라고 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러나 생각없어요. 지난 13대 총선 때 7선에서 8선 고지를 넘지 못했을 때 나는 팔자소관으로 알고 정치판을 떠났어요. 그 후 김대중(金大中)씨가 사람을 보내 출마를 권유했을 때 나는 거절했습니다. 근래 몇차례 선거에서 나타난 지역감정은 2차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보다 더 혹독하고 강해요. 원폭피해자는 기념비라도 세워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지역감정의 피해자로 남으려고 거절한 겁니다. 과거 한민당의 주력은 호남인이었지만 절대 지역냄새가 나지 않았어요.』

―일각에서 민주당의 조순(趙淳)총재를 돕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그런 일 없어요. 좀 더 지켜볼 작정입니다. 다만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우리가 당면한 급한 경제문제를 풀어갈 후보가 없느냐 하는 생각은 갖고 있어요. 물론 건국이념에 대한 확실한 소신과 사상적 검증은 분명히 전제돼야 합니다』

인터뷰 말미에 소석은 「노인답게」 특별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절절한 심정을 거듭 거듭 털어놓았다.

『우리더러 보수반동이라고 하니…. 이대로 눈을 감으면 제삿밥도 못얻어 먹을지 모른다는 게 건국 호국세력들의 솔직한 심정이야』

▼ 약력 ▼

22년〓서울 출생(본적 전북 전주)

42년〓전주북중(전주고 전신)졸업

42년〓고려대 정치학과 입학

45년〓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

46년〓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

47년〓미소공동위원회 학생대표 예비회담 참가

54∼60년〓3,4,5대 국회의원(민주당)

61년〓5.16후 정치규제 해외망명

71∼80년〓8,9,10대 국회의원

76년〓신민당대표최고위원 (당수)

80년〓정치규제

85년〓12대 국회의원당선(신민당)

88년〓13대 국회의원낙선(무소속)

94년〓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공동의장

96년〓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