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입당과 함께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한 趙 淳서울시장은 잘 알려진 경제전문가다.
趙시장이 서울대 교수시절 쓴 「경제원론」은 아직도 이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그가 학교를 떠난 것은 盧泰愚대통령 시절인 88년말 경제부총리를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부총리시절 국회 경과위원이었던 국민회의 金大中총재와 교감를 갖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후 94년초 金총재가 아태재단을 만들면서 趙시장에게 이사장직을 권유할 정도로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됐다.
결국 趙시장은 아태재단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趙시장은 88년 이전에도 현실참여의 기회를 맞은 적이 있었다.
80년 신군부가 득세하자 과거 육사의 영어교수를 지내면서 이들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국보위 경과위원장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후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면서 「경제안정론」을 고수하다 중도하차함으로써 「소신파」로 분류됐다.
趙시장은 특히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지지하고 이를 도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그는 『기득권자들의 반대로 어찌할 수 없었다』고 실패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가 한은총재를 물러난 것도 정권과의 갈등이 주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金泳三대통령 후보측과 정부는 「금리인하와 통화량 증가」등의 경기부양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趙시장은 어렸을 때부터 수재의 길을 걸어왔다.
강릉 중앙국교시절 그는 공부를 잘하고 책읽기를 즐겼다.
趙시장은 작은 아버지가 판사로 일한 평양으로 가 평양중학교를 다니다가 경기중학에 편입했다.
그가 독서회에 가입해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다 퇴학당했다는 이른바 「이념문제」 논란을 야기시킨 것도 경기중학 시절이었다.
그는 서울대 상과대 전문부를 졸업한 후 강릉농고 영어교사를 잠시 지내다 6.25때 육군 통역장교를 거쳐 육사 영어교수가 된다.
그는 이어 57년 「한국의 케인즈」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유학을 떠났으며 67년 귀국, 만 40세에 서울대 상대교수가 됐다.
지난 95년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세기적 전환기에 선 이 나라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지식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옛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趙시장은 서울시장을 지내면서 「포청천」 「산신령」이미지로 상당수 서울시민의 호감을 샀지만 첫 민선시장직을 중도하차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한데 대해 부정적인 여론도 없지 않다.
「큰 욕심」을 위해 시민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서울시정2년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또 정당생활의 경험이 거의 없는 그가 민주당 총재로서 대선정국에 잘 대처해 나갈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그는 시장 취임후 당시 국민회의가 민주당에서 분가해 나가면서 신당참여를 요청하자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며 신당참여 불참을 선언했고, 이어 「시정에 전념하기」위해 민주당마저 탈당했었다.
그런 그가 다시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통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대선출마를 목표로 민주당에 복귀한 것이다.
그의 도전이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