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는 절제, 끝술에는 깊이… 116년 세월이 담긴 나주곰탕[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4일 23시 03분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나주곰탕하얀집’의 곰탕. 1인분에 1만3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나주곰탕하얀집’의 곰탕. 1인분에 1만3000원이다. 김도언 소설가 제공

김도언 소설가
김도언 소설가
곰탕의 본고장 전남 나주시에 왔다. 나주곰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고유명사가 있다. 바로 ‘나주곰탕하얀집’(하얀집)이다. 조선시대 나주목 정청(正廳·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신 객사 건물)인 금성관 앞 원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이 집은 나주곰탕이라는 음식유산의 뿌리이자 살아 있는 역사에 가깝다.

하얀집은 1910년 원판례 할머니가 문을 처음 열었다. 대한제국이 막 저물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격변의 시기였다. 이후 며느리 임이순 여사가 1940, 50년대의 혼란기를 견디며 가게를 지켰고, 아들 길한수 명인이 3대를 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4대 계승자인 길형선 대표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족이 한자리를 지키며 한 가지 음식을 만들면서 이 집은 세속의 무가치함과 묵묵히 싸워 왔다.

노포의 가치는 단순히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문화와 풍속을 만들고 신뢰를 축적한 것에 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하얀집은 한결같이 곰탕을 끓였다. 수많은 식당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동안에도 이 집이 살아남은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복잡한 말이 필요 없다. 역사라는 명분에 앞서 맛이 먼저 식객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본 하얀집의 곰탕(1만3000원)은 화려하지 않다. 첫인상은 맑고 담백하다. 기름기를 걷어낸 국물은 투명할 정도이고, 맞춤하게 삶아낸 쇠고기는 부드럽다. 뚝배기 하나에 부위별로 고른 살코기가 들어 있다. 고기는 당일 도축한 쇠고기만 쓰는 것이 원칙이다. 첫술에서는 절제가 느껴지고 마지막 숟가락에서는 깊이가 느껴진다. 나주곰탕이 지향해 온 미학이란 결국 자극이 아니라 균형이라는 사실을 이 집은 보여준다. 수십 년 전 이곳을 찾았던 손님이 다시 찾아도 같은 맛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노포의 가장 큰 매력이다.

길형선 대표는 27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친 뒤 2011년 가업을 이어받아 전통의 계승에 힘쓰고 있다. 그 노력은 2015년 전라도 향토음식 대한민국 명인 선정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정한 명예는 훈장이나 칭호보다 손님들의 인정 속에 있을 것이다. “나주에 가면 하얀집부터 들러야 한다”는 말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집이 받은 가장 큰 상이다.

요즘 노포라는 말이 흔해진 감이 있다. 온갖 매스컴과 유튜브, 소셜미디어를 통해 숨어 있던 노포들이 쏟아진다. 노포라는 말이 마케팅의 키워드가 된 듯도 싶다. 하지만 세월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영업 전략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루하루 충실하게 쌓은 시간과 온축(蘊蓄)의 총합이다. 나주목사 내아장터에서 시작해 금성관 앞길까지 묵묵히 국물을 끓여온 하얀집의 역사가 바로 그렇다. 지금은 현대적 건물로 반듯해진 이 집에서 한 그릇의 곰탕을 먹는 것은 단순히 한 끼를 때우는 일이 아니다. 원판례 할머니로부터 시작된 116년의 시간과 마주 앉는 일이다. 식객이 뜨는 밥 한 숟가락에 그 의미가 함께 얹힐 때, 먹고사는 일은 비루한 섭생이 아니라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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