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김상운]트럼프 2기 더 중요해진 ‘아베식 정상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1일 23시 06분


2019년 일본 지바현의 골프장을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라운딩 도중 기념 셀카를 찍고 있다. 사진 출처 아베 전 총리 X
2019년 일본 지바현의 골프장을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가 라운딩 도중 기념 셀카를 찍고 있다. 사진 출처 아베 전 총리 X
김상운 국제부 차장
김상운 국제부 차장
“해군함 문제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구축함 50척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안 되면 40척 정도라도요.”(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안 그래도 알아봤습니다만 그게 불가능하답니다. 지난해 제정된 중립법에 위배돼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노력은 했습니다만….”(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그럼 저희가 귀국에서 구입한 P-40 전투기를 수송할 항공모함 한 척만이라도 빌려주실 순 없을까요?”(처칠)

“….”(루스벨트의 긴 침묵)

“대통령님?”(처칠)

영화 ‘다키스트 아워’(2017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깊은 지하벙커 속 어두운 골방에서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전화를 걸어 애걸하는 모습이다. 샴페인과 시가를 줄창 물고 다니며 마초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처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의 대공습(Blitz)으로 런던 등 주요 도시들에서 약 4만 명이 숨지는 등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미국은 중립법을 내세우며 나치와의 결전에 나서지 않았다. 영국이 살길은 오직 대서양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거인의 참전이었다. 처칠은 루스벨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만 총 1161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루스벨트는 788통의 응답 편지를 보냈음). 역사 자료로 남은 처칠의 당시 편지를 살펴보면, 마치 연인의 구애 편지처럼 ‘달콤한 아첨’으로 가득하다.

영미 문화권이란 특별한 정서를 공유하지 못했음에도, 처칠-루스벨트 못지않은 브로맨스를 자랑한 정상들을 꼽는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달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에서도 고인이 된 아베 총리가 여지없이 소환됐다. 이날 트럼프가 다카이치에게 건넨 첫 마디는 “아베는 훌륭한 친구였다”는 말이었다. 이를 두고 요미우리신문은 “회담의 숨은 주역으로서 아베 전 총리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아베 전 총리의 외교적 유산을 활용하는 것은 트럼프 정상외교의 기본 전략”이라고 평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당시 아베와 20번 만났고, 5번의 골프 라운딩을 별도로 가졌다. 특히 두 번째 라운딩에선 하루에 27홀을 돌며 세끼 식사를 함께 했다. 이는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9일 만에 아베가 뉴욕으로 직접 날아가 골프채를 선물하며 환심을 사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골프 회동 후엔 일본산 와규가 아닌 미국산 쇠고기로 만든 치즈버거를 대접할 정도로 철저히 트럼프의 취향을 파고들었다(트럼프는 지난달 갈비찜 등 한식으로 구성된 한미 정상회담 오찬 직후에도 호텔 룸서비스로 치즈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아베의 이 같은 정상외교는 단순한 ‘아첨 외교’가 아니었다. 일본이 처음 제창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OIP)’ 전략을 미국이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중국 견제와 보통국가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주목할 것은 아베식 정상외교가 트럼프 2기 들어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트럼프 1기 땐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 등 경험 많은 외교안보 전문가들로 구성된 이른바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 덕분에 트럼프의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결정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2기 행정부에선 고위직 경험이 부족한 충성파들로 내각이 채워져 트럼프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 됐다. 최근 주요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트럼프의 재가가 핵심 관문이 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마이클 그린 전 미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국장은 최근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 “트럼프와의 개인적 관계는 그의 첫 임기 때보다 아시아 국가들에 훨씬 중요하다”며 “아시아 지도자들은 아첨(flattery), 설득(persuasion), 정치적 보조 맞추기(alignment) 중 어떤 조합을 동원해서라도 미국이 아태 지역에 계속 관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썼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미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로 한미 갈등 조짐이 불거진 가운데,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신라 금관 모형을 선물하며 트럼프의 환심을 샀다는 외신 보도는 일견 다행스럽다. 다만, 단순한 아부에 그치지 않고 미국의 정책을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유도한 아베의 외교 기술을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다.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루스벨트#제2차 세계대전#중립법#다키스트 아워#정상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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