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의 무비홀릭]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0일 23시 09분


영화 ‘경계선’. 경계와 구분을 넘어설 때 진짜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영화 ‘경계선’. 경계와 구분을 넘어설 때 진짜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영화 ‘경계선’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지난달 개봉한 노르웨이 영화 ‘언데드 다루는 법(Handling the Undead)’을 보고 나면 충격 받아요. ‘오피스 506호 아가씨의 체취’(국산 에로영화 제목) 수준으로 흡입력 있는 이 영화의 제목과 달리, 상상초월 수준으로 진지하고 사색적이며 탈(脫)자극적이고 초(超)오락적이니까요. 어린 아들이 죽고 슬픔에 빠진 엄마,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한 남편, 동성 애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헛헛한 마음으로 텅 빈 집에 돌아온 노파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해요. 그런데 원인 모를 정전이 일어나요. 이후 숨졌던 아들, 아내, 애인이 무덤에서 깨어나 좀비 상태로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에요. 자,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아내, 애인이 ‘죽지 않은’(‘undead’이므로 죽지 않은 상태일 뿐 살아난 건 아님) 좀비 상태로 돌아왔어요. 이제 남은 건 행복뿐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영화는 말해요. 대화도 교감도 다툼도 불가능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는 오히려 사별이 주었던 순도 높은 상실감을 오염시킬 뿐이니까요. 스웨덴 소설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삶’과 분명한 경계를 이루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겐 축복일지 모른다는 질문을 품고 있어요.

[2] 린드크비스트의 소설들은 ‘경계’에 깃든 축복이나 저주나 고난을 다루기에, 영화로 옮겨지는 경우 뜻밖이다 못해 충격적인 이미지로 나타나요. 스웨덴 영화 ‘경계선’(2018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이 문제작엔, 출입국 세관 직원으로 일하는 ‘티나’라는 여성이 등장해요. 짐승을 연상시키는 얼굴 탓에 주변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겐 남다른 능력이 있어요. 냄새를 통해 타인의 감정을 감지하는 능력이죠. 티나는 마약은 물론 아동성착취물이 담긴 휴대용 저장장치까지 귀신처럼 잡아내요. 그것을 소지한 범죄자들이 품는 긴장감을 냄새를 통해 포착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티나는 출입국을 통과하던 ‘보레’란 이름의 남자를 붙잡아요. 남자는 티나처럼 기괴한 얼굴이죠. 남자의 짐과 신체를 샅샅이 뒤진 세관 당국은 두 가지 이유에서 화들짝 놀라요. 첫째론 문제 될 물건이 전혀 적발되지 않음으로써 티나의 예측이 처음으로 빗나갔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둘째론 이 남자가 여성의 성기를 가졌기 때문이죠.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보레와 재회한 티나는 보레로부터 “우리의 정체는 트롤(북유럽 신화 속 괴물)이며, 갓난아기 때 인간에게 꼬리를 잘린 뒤 인간인 양 길러져왔다”는 믿기 힘든 사실을 전해 들어요. 결국 자아 각성한 티나는 난생처음 강렬한 번식욕을 느끼면서 숲속에서 보레와 관계하는데, 아이쿠! 티나의 몸에서 자신도 모르던 남성 성기가 돌출하여 보레와의 합궁이 완성된답니다!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극복할 때 비로소 우린 타인이라는 존재의 본연(本然)과 진솔히 마주하게 됨을 말하고 있었어요.

[3] 생각해 보니, 예술의 감동은 경계와 구분이 허물어지는 순간에 찾아와요. 피카소는 정면과 측면이라는 시점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2차원 캔버스에다 여러 시점을 입체적으로 담아냈어요. 도경수 주연의 최신작 ‘말할 수 없는 비밀’(1월 개봉)도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가 야속한 시간의 벽을 넘어 오로지 사랑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죠. “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친딸로 생각한다”는 시어머니 말씀이 감동적인 것도, 며느리와 친딸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어머니의 진심이 읽히(었으면 제발 좋겠다고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고요.

오잉? 얼마 전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에서도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시적 표현이 등장해 무척 놀랐어요. 변론기일에 출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지시를 했느니 (그 지시를) 받았느니 이런 얘기(증언)들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바로 그 순간, 저는 진실과 거짓, 사실과 해석, 의도와 결과의 경계가 휘발되는 냄새를 영화 ‘경계선’ 속 트롤족 티나처럼 감지하면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고 욕망의 심연으로 자맥질하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년)를 새벽 3시에 상추 씹으면서 보는 듯한 초현실적 모멘트를 경험했답니다. 이게 무슨 알쏭달쏭 긴가민가 가물가물 애매모호한 소리냐고요? 경계를 허무는 게 예술이고, 없는 경계도 만들어내는 게 정치라니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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