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언제 예술이 되는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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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일상에서 만나는 예술품

리움미술관에서 5월 28일까지 열리는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 청화백자 ‘백자청화매죽문호’ 등 다양한 조선백자 걸작들을 볼 수 있다. 리움미술관 제공
리움미술관에서 5월 28일까지 열리는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 청화백자 ‘백자청화매죽문호’ 등 다양한 조선백자 걸작들을 볼 수 있다. 리움미술관 제공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자 전시 ‘군자지향(君子志向)’에는 15세기 말 조선을 통치했던 성종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성종은 백자 술잔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술잔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여, 술을 따라도 티끌이나 찌끼가 모두 보인다. 사람에게 비유하면, 한 점 허물 없이 공정한 사람이 선하지 못한 일을 용납 못 하는 것과 같다(賜白磁杯于承政院. 仍傳曰, 此杯潔凈無瑕, 注之酒, 塵滓畢見, 比諸人, 若大公至正無一點之累, 則不善之事, 無得容焉).” 성종은 맑고 티 없는 백자의 모습을 지극히 공정한 군자의 인격에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에 걸맞게 ‘군자지향’ 전시실에는 고아한 예술적 향취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백자들이 한가득 빛나고 있다. 해외 소재 걸작은 물론 국가지정문화재 백자 중 절반이 넘는 자기가 일제히 모인 장관이 그곳에 있다.

한편, 이처럼 예술적으로 뛰어난 조선백자는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백자 중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일상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다.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담고, 그리고 때때로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했던 것이 자기였다. 그래서일까, 조선왕조실록의 자기 관련 기사 중에서 위에서 인용한 성종의 말 같은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관찬 사료 속 자기 관련 기록은 대개, 어떤 제사에 어떤 자기를 쓸 것인가, 대량 생산할 자기에 들어갈 양식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같은 ‘비예술적인’ 언급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옛 자기를 볼 때마다 나는 질문한다. 자기는 언제 어떻게 예술이 되었을까. 식민지 시대 일본인 감식가들이 조선백자의 예술성을 새삼 찬탄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백자의 예술성에 눈감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백자의 예술성 자체를 상세하게 논한 산문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아쉬운 대로, 백자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씨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백자를 통해 향유했던 심미적 충일감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에서 단연 내 눈길을 끌었던 백자는 15세기 말 혹은 16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백자청화망우대명 초충문 잔받침(白磁 靑畵 忘憂臺銘 草蟲文 楪匙)’이다. 대단히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그 어떤 서투름도 없이 그려진 국화와 벌의 자태, 그리고 잔 테두리에서 유연하게 띠를 이루고 있는 원주문(圓珠文)도 흥미롭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닥에 적힌 ‘忘憂臺(망우대)’라는 세 글자였다.

‘망우’란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공동묘지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망우리(忘憂里)에 나오는 바로 그 ‘망우’다. ‘대’는 전망대(展望臺), 경포대(鏡浦臺)와 같은 단어에서 보이듯이 주변을 살펴볼 수 있게끔 높이 지은 건축물을 지칭하거나, 무대(舞臺)와 같은 단어에서 보이듯이 지면보다 높이 있는 평평한 물체를 보통 가리키지만, 잔받침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글자이기도 하다.

15세기 말 혹은 16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백자 잔받침.
‘근심을 잊는 잔받침’이라는 뜻의 ‘忘憂臺(망우대)’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위 사진). 커피잔 바닥에 그려진 귀여운 그림. 잠시
나마 근심을 잊게 만든다. 김영민 교수 제공
15세기 말 혹은 16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백자 잔받침. ‘근심을 잊는 잔받침’이라는 뜻의 ‘忘憂臺(망우대)’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위 사진). 커피잔 바닥에 그려진 귀여운 그림. 잠시 나마 근심을 잊게 만든다. 김영민 교수 제공


‘백자청화망우대명 초충문 잔받침’에는 작은 백자 잔이 딸려 전해오고 있다고 하니, 이 잔받침을 사용해서 술 마시던 옛사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근심에 젖은 어떤 군자가 어느 날 참지 못해 술을 한잔 들이켜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술을 가득 붓고 마시려고 잔을 들라치면, 자연스럽게 잔 밑에 가려져 있던 ‘망우대’(근심을 잊는 잔받침)라는 글자를 보게 되는 거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이 술은 주정을 부리거나 근심을 더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근심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이라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오늘날 일상에서 저런 백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머그잔이 아닐까. 식후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늘 집어 드는 일상용품으로서의 머그잔. 그 잔이 내 눈앞에서 하나의 사적인 예술품으로 변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점심 식사 후, 내가 내밀하게 좋아하고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간다. 멀리까지 혼자 조용히 걸어간다. 그곳은, 커피를 내주는 사람도 친절하고, 커피도 향기롭고, 커피잔 역시 만족스럽다. 만족스러운 커피잔은 일단 기능에 충실하다. 커피를 무리 없이 담을 만한 크기이되, 잘 넘어지지 않게끔 밑바닥이 충분히 넓고 평평해야 한다. 그리고 입술에 대었을 때 이물감이 들지 않게 둘레의 굵기와 각도가 적절해야 한다.

커피잔이 지닌 기능적 충실함에 만족한 나는 이제 잔의 겉면에 그려진 그림이나 디자인을 새삼 감상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신다. 천천히 마신다. 커피가 줄어든다. 이제 잔 바닥에 그려진 그림을 기대할 시간이 왔다.

이 커피잔은 맑고 티가 없어서, 커피를 3분의 2 정도 마시면 바닥의 귀여운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를 사람에게 비유하면, 마치 귀여움에 절여진 나머지 볼썽사나운 그림은 도대체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귀여움을 한껏 누리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뒤, 공방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잔받침을 뒤집는다. 어디에서 만든 잔이길래 이토록 귀엽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잠시나마 근심을 잊는 일상의 의례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자기#리움미술관#군자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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