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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장쩌민과 백지 시위[횡설수설/송평인]

입력 2022-12-02 03:00업데이트 2022-12-0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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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별세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해외 언론에 첫 주목을 받을 당시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의 뒤를 이어 덩샤오핑이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다. 자오쯔양은 후야오방 전 총서기와 함께 정치에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쪽이었으나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경제에서의 개혁만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편이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은퇴한 직후인 1993년 중국 국가주석에 올랐다. 그는 10년을 집권한 뒤 덩샤오핑이 정한 후진타오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후진타오도 10년을 집권한 뒤 장쩌민이 정한 시진핑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시진핑은 10년을 집권하고도 물러나지 않는다. 차기 지도자도 정해지지 않았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처럼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겠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이라는 오페라가 1막 마오쩌둥, 2막 덩샤오핑, 3막 시진핑으로 구성된다면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집권기는 2막과 3막 사이의 긴 간주 정도로 격하될 모양새다.

▷장쩌민에게는 총리로 주룽지가 있었고 후진타오에게는 원자바오, 시진핑에게는 리커창이 있었다. 경제전문가로서 으뜸은 주 총리다. 장쩌민-주룽지 2인조의 최대 업적은 덩샤오핑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성사시킨 것이다. 톈안먼 학살의 음습한 구름을 뚫고 중국의 공장 불빛이 세계를 향해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은 장쩌민 집권기라고 할 수 있다.

▷장쩌민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달리 서방 언론에 과감한 노출을 택한 첫 중국 지도자이지만 덩샤오핑이 1979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만큼도 인상적인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진타오나 시진핑에 비하면 훨씬 친근해 보이는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1996년 필리핀 방문 중 피델 라모스 대통령과 함께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를 부르는 모습 등이 그런 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티베트와 파룬궁에 대해 잔혹한 탄압도 불사하는 차가운 면이 숨겨져 있다.

▷중국에서 시진핑식 코로나 봉쇄에 반대하는 백지(白紙) 시위가 상하이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이 시위에 장쩌민이 소환되고 있다. 장쩌민은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 당서기로 있으면서 베이징과 같은 유혈사태 없이 상하이의 시위를 해산시켰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영어로 외면서까지 시위대를 설득했다고 한다. 톈안먼 시위가 후야오방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커졌듯이 백지 시위도 시진핑보다는 장쩌민 시대가 나았다는 추모의 분위기 속에서 확산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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