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공무원이 메신저를 못 쓰는 이유 [특파원칼럼/이상훈]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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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 문제 불거진 뒤 메신저 사용 제한
위험성 제로 아니라면 불편해도 대비해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이상훈 도쿄 특파원
얼마 전 일본의 한 중앙부처 공무원과 만났을 때 일이다. 업무로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고 급하면 전화 통화도 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별 뜻 없이 “메일이나 전화는 번거로우니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으로 소통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하면 편하긴 한데 원칙상 안 된다. 불편해도 지금처럼 하자”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고 제안을 거둬들였다.

디지털화가 뒤처졌다고 해도 일본 역시 메신저 앱 천국이다. 초등학생끼리 놀다가 친해지거나 어른끼리 술 한잔 마시다가 말이 통한다 싶으면 스마트폰부터 꺼내 일본 국민 메신저 ‘라인’ 친구 추가를 한다. 한국인 지인이라도 있다면 카카오톡 설치가 필수다. 우크라이나에 취재진을 보낸 일본의 한 언론사는 텔레그램으로 ‘단톡방’을 만들어 현지와 실시간으로 소통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영역으로 넘어가면 편리성은 리스크로 부각된다. 지난해 초 일본에선 라인이 중국 업체에 인공지능(AI) 개발 업무를 맡기는 과정에서 중국인 개발자가 서버 개인 정보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려가 커졌다. 부랴부랴 일본 내각부에서 조사해 보니 주민 개인정보, 자살 및 왕따 상담 정보 등이 메신저로 다뤄졌고 직원끼리 라인으로 업무 의사소통을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비판 여론이 커지자 일본 정부는 작년 4월 ‘메신저 앱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정책 홍보 등에 이용하는 걸 막진 않겠지만 개인 정보 등을 다루는 건 원칙적으로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주고받는 것도 안 된다고 못을 막았다. 정부가 민간 메신저 보안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메신저에 의존했다가 불통되면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국민 편리가 최고니 적당한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않느냐는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매뉴얼대로 한다고 위험성이 완벽히 제거되는 게 아니고 되레 비효율성만 커질 수 있지만, 적어도 데이터 서버 화재 한 건으로 국가 행정이 마비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됐다.

별일 없는 평소라면 기우로 여겨질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아날로그를 버리지 못하는 건 일본의 오랜 습관이다. 일본 국민들이 지진, 지진해일(쓰나미) 대비용으로 준비하는 방재 키트에는 휴대용 라디오가 필수 품목이다. 동일본 대지진 같은 재해 시 목숨을 지킬 대피 정보를 접하려면 전기가 끊겨도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가 최후의 수단이라는 걸 피부로 체험했다. 현금 없는 결제가 확산돼도 지갑에 지폐 몇 장은 꼭 넣어둔다. 재난으로 통신망이 마비되면 신용카드도, 간편결제 서비스도 무소용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날로그 집착을 무작정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제로(0)라고 장담할 수 없는 위험성이 있다면 적어도 정부는 다소 불편해도, 디지털에 조금 뒤처지더라도 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그동안 편리하다는 이유로 보안 리스크, 재난 위험성을 외면하고 앞장서 메신저 앱 의존도를 높인 원죄가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일 때 카카오, 네이버 QR코드 확인 한 번으로 백신 접종 여부와 위치 정보 확인을 할 수 있다고 자랑했지만, 돌이켜 보면 뭘 믿고 민간 기업에 그런 중요한 서비스를 떡하니 맡겼을까 하는 아찔함이 든다. 별다른 보안 투자 개발 대책 없이 상업용 앱에 의존해 온 정부가 “전쟁 같은 비상 상황에 카톡 먹통 되면 어떡할 건가”라며 호통 치는 건 재난 대비에 무능했다는 걸 자인하는 꼴이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일본 공무원#메신저#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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