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형준]‘자율’이라고 적혀 있지만 ‘강제’로 읽힌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자율로 포장해 금융권 압박 나서는 정부
금융 경쟁력 낮추는 또 하나의 모래주머니

박형준 경제부장
박형준 경제부장
일본 정계에는 ‘30% 룰’이 있다. 의원내각제인 일본의 집권당은 내각 지지율이 30%를 밑돌면 총리 교체를 검토한다. 총리가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내각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 예외 없이 총리를 교체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잇달아 직무수행 긍정평가가 30% 아래로 떨어졌다.

정부는 평상시 같았으면 ‘경제’에서 돌파구를 찾을 것이다. 재정 집행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시중에 돈을 공급하면 경제는 살아난다. 내 배가 부르면 정권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은 돈을 풀 형편이 안 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이미 엄청나게 돈을 푼 데다 원자재 가격 고공행진, 원-달러 환율 급등(원화 가치 급락) 등의 영향으로 물가가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리를 올려 시중에 풀린 돈을 흡수해야 해 경기 침체가 우려된다. 실제 상당수 기업이 비상 경영을 선언하며 투자와 지출을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눈에 들어온 게 금융권 아닐까 싶다. 대부분 은행들은 올해 상반기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 금리 인상기엔 대출 금리가 곧바로 오르고 예금 금리는 천천히 오르는 경향이 있어 예대마진이 늘어난다. 면허(라이선스)로 은행을 관리하는 정부로선 은행이 공적 역할을 대신해 주길 내심 바랐을 것이다.

5월 이후 새로 취임한 정부와 금융 당국 수장들은 입을 맞춘 듯 은행의 ‘이자 장사’를 비판했다. “은행의 지나친 이익 추구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도 했다. 여론 역시 우호적이었다. 그러자 시중은행들은 고정형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즉각 내렸다. 예금과 대출은 은행업의 본질이지만, ‘이자 장사’라는 프레임에 은행이 꼼짝 못 했다.

지난달 14일 금융위원회는 금융 부문 민생안정 대책을 발표하며 9월 종료 예정인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만기 연장과 상환 유예 조치에 대해 “주거래 금융기관의 책임 관리를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덧붙여 “차주(돈 빌린 소상공인)가 신청하는 경우 자율적으로 90∼95%는 만기 연장 및 상환 유예 해주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금융위는 ‘자율’이라고 표현했지만 금융기관들은 ‘강제’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부실 대출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계속 만기를 연장해 줘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7일 6조6000억 원에 이르는 수상한 외환 거래에 대한 잠정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큰 규모의 송금 거래가 이뤄지면 일단 뭔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며 은행을 질책했다. 이에 대해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은행 창구 직원은 매뉴얼대로 적법하게 대응했다. 어떻게 서류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느냐”고 반문했다. 금감원의 칼끝이 ‘관리 책임’이란 명목으로 은행장, 지주 회장으로까지 향하지 않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새 정부는 민간시장 중심의 역동성을 강조하며 “모래주머니를 확 벗겨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금융권에 대해선 관치(官治)가 여전한 느낌이다. 정부는 “언제 강제로 지시한 적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와 감독을 받는 금융권으로선 금융 당국자의 말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주머니를 하나둘 차게 되면 금융 경쟁력은 그만큼 떨어진다.

박형준 경제부장 lovesong@donga.com
#윤석열 정부#금융권 압박#모래주머니#자율#강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