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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수부’ 기와 발굴… 힘 받는 백제의 ‘익산 천도론’[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입력 2022-06-28 03:00업데이트 2022-06-28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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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릉 중 소왕릉에서 출토된 목관 뚜껑 장식(너비 7.1cm). 백제 왕족 특유의 목관 장식품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무왕은 31명의 백제왕들 가운데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무왕이 선왕인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지만, 무왕을 ‘강화도령’ 철종처럼 초야에 묻혀 살던 방계 왕족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그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실려 있다. 그는 과부 어머니와 연못의 용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 마를 캐며 살았고, 지략을 발휘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으며, 후에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스토리다.

그는 600년부터 641년까지 장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사비도성 일원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익산에 그와 관련한 전승과 유적이 남아 있고 일부 문헌에는 그가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게다가 근래까지 그러한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발굴 성과가 조금씩 쌓여 어느새 무왕의 익산천도설이 힘을 받는 모양새다. 무왕은 과연 익산으로 도읍을 옮겼을까.
○ 日 교토 사찰에서 발견된 실마리
1970년 일본에서 백제사 관련 중요 기록 하나가 공개됐다. 교토의 한 사찰에 소장된 관세음응험기라는 고서에 ‘백제 무강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했다. 639년 번개가 쳐 제석정사가 불탔다. 탑 아래의 여러 보물 중 불사리가 든 병과 금강경을 담은 목칠함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이 기록을 활용한 연구가 본격화했고 학자들은 무강왕을 무왕, 지모밀지를 익산으로 추정하면서 익산천도설을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이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 견해도 나왔다. 불사리의 영험함을 보여주려 과장해 서술한 것이므로 사료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기록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유적이 2003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광대 박물관이 제석사지 북쪽에서 639년 제석사 화재 때 불탄 기와, 벽체, 소조불상 조각들의 폐기장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1965년 발견된 왕궁리 5층 석탑 속 사리기와 금강경판이 관세음응험기에 묘사된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연구도 같은 해에 나왔다. 즉, 원래 제석사 목탑에 안치되었던 사리기와 금강경판이 화재 이후 왕궁리 5층 석탑에 다시 봉안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 남북으로 492m, 동서로 234m인 왕궁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1989년부터 왕궁리 5층 석탑 주변에 대한 발굴에 나섰다. 당초 사찰의 규모와 성격 등을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칠 예정이었지만 탑 남쪽에서 정전(正殿) 성격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는 등 왕궁으로서의 면모가 확인되면서 전면 조사를 통해 왕성의 구조를 확인하는 쪽으로 조사의 방향이 틀어졌고 33년이 지난 지금도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그 사이 남북으로 492m, 동서로 234m에 달하는 네모난 공간에 정연한 담장을 돌리고 그 안에 다양한 건축물을 배치한 백제 궁궐터가 차례로 속살을 드러냈다. 남쪽 구역에서는 건물터들이, 북쪽 구역에서는 자연미를 갖춘 후원이 조사됐다. 후원의 서쪽 낮은 공간에서는 귀금속공방터와 대형 화장실 흔적이 확인됐다.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은 관련 주장을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힘을 받고 있다. 전북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인근에서 출토된 기와. ‘왕이 거처하는 수도’라는 뜻의 ‘수부(首府)’가 적혀 있어 옛 왕궁 터 가능성을 높였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초기부터 유적지 곳곳에서 범상치 않은 유물이 쏟아졌다. ‘상부을와(上部乙瓦)’, ‘하부을와(下部乙瓦)’, ‘수부(首府)’ 등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특히 ‘수부’명 기와는 사비도성 이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수부란 왕이 거처하는 수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그간의 발굴을 통해 먼저 백제의 왕성이 건축되었고 그 이후 시기에 일부가 절로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다. 발굴 결과만을 놓고 보면 이 유적을 백제의 왕궁으로 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 소왕릉의 주인은 선화공주?
전북 익산 쌍릉 중 대왕릉에서 출토된 금송으로 만든 목관(길이 2.55m·복원품). 백제 왕족이 일본산 금송을 선호한 데다 ‘무왕 부부의 능’이라는 기록이 전해져 무왕이 주인으로 추정된다.
1917년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박물관 전시품 확보를 명분으로 백제 고분 발굴에 나섰다. 발굴 대상에 익산 쌍릉이 포함됐다. 쌍릉은 무왕 부부의 능으로 고려 충숙왕 때 도굴 당했다는 옛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대왕릉에서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목관과 함께 옥으로 만든 허리띠장식, 반파된 토기 등이 출토됐지만 소왕릉에는 목관 장식품 몇 점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오랫동안 대왕릉은 왕, 소왕릉은 왕비의 무덤으로 여겨졌다.

2009년 1월, 미륵사지에서 긴급뉴스가 타전됐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나온 사리봉영기에 무왕의 왕비가 ‘백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이 소식은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이 간행한 쌍릉 발굴보고서는 이러한 논쟁을 격화시켰다. 박물관 연구원들은 대왕릉에서 수습된 치아 4점이 20, 30대 여성의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한편, 출토된 토기를 신라계로 보면서 무덤 주인공이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관련 내용이 언론에 연이어 보도되면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자 정부 당국은 쌍릉에 대한 재발굴을 결정했다.

2018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대왕릉의 무덤방 입구를 다시 열었을 때 그 속엔 나무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여니 인골 편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일인들이 발굴한 다음 인골을 별도로 모아둔 것으로 보인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법의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한 다음 ‘뼈의 주인공은 신장이 최대 170.1cm, 7세기 초중반의 어느 시점에 세상을 뜬 60, 70대 남성이며, 무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후 대왕릉에 묻힌 인물이 무왕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익산에는 무왕과 관련한 전승과 유적이 존재한다. 왕궁, 왕실사찰, 왕릉이 모두 확인되었기 때문에 익산에 새로운 왕도가 건설되었을 공산이 크다. 다만 아직 왕궁 주변의 도로망, 백성들의 거주 구역 등이 제대로 발굴된 바 없어 새로운 왕도가 어느 정도의 범위에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 기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장차 체계적 발굴 및 연구를 통해 백제사 최고의 미스터리, ‘익산 천도’ 논의가 큰 진전을 이루길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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