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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美제2의 낙태 전쟁[횡설수설/이정은]

입력 2022-06-28 03:00업데이트 2022-06-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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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6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피임이 금지돼 있었다. 부부가 피임기구를 쓰거나 피임약을 먹어도 처벌받았다. “침실 생활은 프라이버시”라고 인정한 1965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법의 족쇄가 풀렸다. 법에 반대하던 산부인과 전문가가 일부러 피임약 처방을 해주고 체포된 뒤 소송을 통해 얻은 결과였다. 몸과 성(性)에 대한 자기결정권은 치열한 법정 투쟁을 거쳐 얻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 전역이 들끓고 있다. 여성들이 지난한 법정 싸움을 거쳐 얻어낸 낙태권이 49년 만에 다시 법정에서 뒤집힌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성 활동가들은 “되돌리는 데 평생이 걸릴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 태세다. 분노와 눈물, 한탄으로 범벅된 연방대법원 앞 반발 시위 현장에서는 “죽기 살기로 싸울 때”라는 결기 어린 목소리가 쏟아진다.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지키려는 싸움은 결국 여성의 낙태권을 넘어 몸의 자유, 선택할 권리를 지키겠다는 이들의 몸부림이다. 낙태가 수정헌법 14조에 규정된 ‘사생활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연방대법원의 논리도 이들의 반발을 키웠다. 보수화된 대법원이 수십 년간 유지돼온 헌법의 해석을 흔들어 19세기로 돌리려 한다는 위기의식이 높다. 이번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3명 중 2명이 이번 판결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제2의 낙태 전쟁’은 정치와 사법, 민간단체, 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총력전으로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낙태권리 옹호단체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낙태를 반대하는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캠페인에 돌입했다. 최소 1억5000만 달러를 쏟아부을 계획이다. 이에 앞장서는 민주당에도 벌써부터 후원금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번 판결을 “신의 결정”이라고 반기는 종교계와 보수 공화당 인사들은 낙태가 금지되는 26개 주뿐 아니라 50개 주 전체의 낙태 시술을 막아버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세계적 흐름과 거꾸로 가는 미국의 판결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제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낙태를 허용해온 유럽 국가들은 낙태 조건을 완화해달라는 목소리를 되레 높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속 입법이 공백 상태다. 임신중절 수술이 가능한 임신 주수 등에 대한 종교계와 여성계, 정치권의 입장이 모두 다르다. 국회가 논의조차 밀쳐놓은 사이 음지의 불법 시술과 부작용 사례만 쌓여 간다. 여성들의 외침을 외면하는 직무유기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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