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진석]사라지는 5만 원권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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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 원짜리 지폐가 숨고 있다. 올해 1∼10월 5만 원권 지폐의 환수율이 17.75%로 떨어졌다. 2009년 6월 5만 원권을 발행하기 시작한 이후 최저 수치다. 한국은행은 올 들어 10월까지 5만 원권을 약 19조7721억 원어치 발행했는데, 환수된 5만 원권은 3조5087억 원어치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10장 중 8장 이상이 어딘가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이야기다. 5만 원권 환수율은 2019년만 해도 60% 수준이었다. 지난해 24%로 뚝 떨어지더니 올해는 그 추세가 더 가속화한 것이다.

▷한은에 환수되지 않은 5만 원권은 금고나 장롱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5만 원권에 대한 수요 증가 현상을 반영하듯 금고 판매도 크게 늘고 있다. 올해 1∼10월 해외에서 들여온 금고 수입액은 492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 가까이 늘었다. 5만 원권으로 15억 원 정도를 보관할 수 있는 금고가 인기라고 한다.

▷5만 원권 환수율이 낮아진 1차 원인으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경기 불확실성이 커진 점이 꼽힌다. 금리가 낮아서 은행에 예금을 해도 이자가 거의 붙지 않는다는 점도 현금 수요를 자극하고 있다. 디지털금융 활성화로 현금 거래 자체가 줄고 있는 것도 5만 원권이 돌지 않는 것과 관련이 크다. 하지만 5만 원권 회수율이 급격히 낮아진 데는 이처럼 정상적인 경제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고액권 수요는 지하경제와는 아무리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세금 부담이 늘면 세금 탈루를 위한 고액권 수요가 커질 공산이 크다. 최근 들어 세금 부담이 커진 부동산 분야에서 탈루 적발이 많다. 부동산을 자식에게 증여하고 증여세를 현금으로 조금씩 나눠서 보태주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금융정보원은 하루 1000만 원 이상 규모의 현금 입출금을 모두 알고 있다. 최근 일부 집주인들은 임대료를 음성적으로 높이면서 월세의 일부를 현금으로만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이런 돈들은 금고에서 잠을 자다가 은밀하게 쓰이기 마련이다.

▷5만 원권은 2009년 이후 올해 9월까지 256조6670억 원이 발행됐고, 이 중 116조4082억 원만 회수됐다. 나머지 약 140조 원이 회수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간 5만 원권 환수율은 미국 100달러 지폐의 환수율 70%대와 유럽 500유로 지폐의 90%대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시중에 풀린 고액권이 지하경제로 흘러들면 세수 부족으로 증세 요인이 되고, 이는 다시 탈세용 고액권 수요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우려가 아니더라도 지하경제의 규모가 커지면 정치나 사회적으로도 많은 주름살이 생기게 된다. 정부가 5만 원권의 ‘퇴장’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



#5만 원권#지폐#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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