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못 받아 처형된 총정치국 38부장[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

주성하 기자 입력 2021-07-08 03:00수정 2021-07-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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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북한이 영빈관으로도 활용하는 백화원초대소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 북한엔 이런 초대소가 30여 곳이 있다. 박수를 치는 직원들은 모두 총정치국 38부 소속 군인 신분이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북한 노동당 비자금을 관리하던 38호실은 많이 알려졌다. 38호실은 2008년경 비슷한 역할을 하는 39호실과 통합된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군에도 숫자 ‘38’로 시작되는 38부라는 비밀 부서가 있다. 총정치국 소속인 38부는 김정일 시절부터 있던 역사가 오랜 조직이지만 지금까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부서의 임무는 김씨 일가의 별장 관리다.

북한에는 초대소 또는 특각으로 불리는 김씨 일가의 별장이 최소 30여 개 있는데, 평양에만 10개가 넘는다. 백화원초대소나 고방산초대소처럼 과거 한국 대통령 방북 때 숙소로 사용해 외부에 알려진 것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북한 사람들도 잘 모르는 비밀시설이다. 평양의 대표적 비밀 초대소는 문수거리의 문수초대소, 모란봉 자락의 모란초대소, 혁신역 근처 비파초대소 등을 들 수 있다.

김정일은 수시로 측근들을 초대소에 불러 밤새 술을 마셨다. 초대소를 수십 곳이나 만든 것은 한곳에만 다니면 질리니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한곳에만 계속 가면 초대소 종사자들이 “장군님은 일은 안 하고 밤마다 술판만 펼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정 초대소에 어쩌다 한 번 가야 “장군님이 열심히 일하다가 오랜만에 쉬러 오셨으니 잘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김정일 사망 후 이 초대소들은 김정은이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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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소는 요리사를 제외한 모든 근무 인원이 군 소속이다. 군복을 입혀 놓고 관리하는 것이 비밀 유지나 운영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성들도 많은데 5과 선발을 통해 전국에서 뽑아 온 미녀들이다. 초대소를 호위사령부에서 관리할 법하지만 경호원들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이 폭로되는 것이 싫었는지 경비는 호위사령부에서, 관리는 총정치국 38부에서 하도록 분리했다.

38부는 과거 왕조 시절 내시나 환관이 담당했던 일을 하는 부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우두머리로 상선이나 태감과 같은 위치에 있는 38부장의 계급은 중장이다. 왕조 시절 권력과 거리를 두었던 상선이 오래 자리를 지켰듯이, 북한도 38부장은 잘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4월 38부장이 어이없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내막을 잘 아는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혁신역 앞에 있는 비파초대소에 김정은이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그날은 리설주와 부부 동반으로 와서 술을 마시고 갔는데, 둘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였다.

김정은이 돌아간 뒤 비파초대소 근무원들이 모였다. 북한 초대소들에는 행사가 끝나면 그날 봉사조가 한자리에 모여 “이번에 행사를 잘했다”고 격려하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면 총화를 한 뒤 회식을 하는 관행이 있다. 음식도 잔뜩 준비한 날이니 다 먹어치우기 위한 목적도 있을 것이다. 이런 행사는 38부장이 주관한다. 그는 상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김정은이 어느 초대소에 나타났다고 하면 현지에 나와 모든 것을 지휘한다.

그날따라 38부장은 기분이 좋았는지 부하들과 술을 과하게 마시고 곯아떨어졌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비파초대소 성원들은 38부장이 술도 깨기 전에 끌려가 처형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필 그날 새벽 김정은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38부장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못했다는 것이 죽은 이유였다. 특징적인 것은 김정은과 리설주가 그날 술을 마시고 떠나기 전 설탕 없는 진한 블랙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갔다고 한다. 밤에 블랙커피를 마시는 것이 김정은의 습관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자정 직전에 커피를 마신 김정은은 잠이 오지 않았는지 갑자기 38부장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취해버린 38부장이 전화를 받지 못했고, 김정은은 이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얼마 뒤 군인들이 들이닥쳐 38부장을 끌고 갔다.

2014년 4월은 김정은이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을 때였다. 5개월 전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처형한 뒤 ‘여독을 청산’한다면서 다음 해 봄까지 관계자 수천 명을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매일 수십 명 살생부에 사인을 할 때이니 김정은에겐 상선의 목숨쯤은 하찮게 보였을지 모른다. 38부장의 죽음은 북한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치국 위원으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노동당 박태성 비서나 최상건 비서는 이름이라도 남겼다. 하지만 38부장처럼 충복으로 살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는 또 얼마나 많을까. 그 숫자를 헤아릴 만한 사람도 이미 북한에 남아 있지 않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처형#총정치국 38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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