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앞에 피해자 이름, 이번이 마지막이어야[광화문에서/신광영]

신광영 사회부 차장 입력 2021-01-29 03:00수정 2021-01-2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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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차장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사건 이후 세탁소에 옷을 찾으러 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세탁소 주인은 PC로 김지은을 검색해 일련번호를 본 후 ‘김지은, 김지은’ 중얼거리시며 옷을 찾았다. 그동안 PC 모니터에 내 이름이 계속 떠 있었다. 갑자기 다른 손님이 불쑥 들어올까 봐 초조해졌다. 몇 번이고 마우스를 잡아 ‘김지은’ 이름을 없애고 싶었다.”

2018년 방송에 직접 출연해 피해 사실을 밝혔을 정도로 고난을 각오했던 김 씨에게도 타인에게 이름을 노출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던 것 같다.

2008년 발생한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는 최근 조두순 출소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 주거 지역으로 돌아오는 게 직접적 원인이지만 사건 후 12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피해자의 이름이 회자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이제 성인이 된 피해자와 가족들은 “제발 잊어 달라”고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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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에서 생후 16개월 입양아가 학대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피해 아동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이의 해맑게 웃는 얼굴도 뇌리에 생생히 새겨졌다. 그전까지 ‘방관자’에 머물던 많은 이들이 ‘목격자’로 바뀌는 효과가 있었다. 사회적 공분이 일었고 검찰은 가해 양모를 더 무겁게 처벌하기 위해 주요 죄명을 아동학대치사에서 살인죄로 바꿨다. 각종 아동학대 대책도 쏟아져 나왔다.

뒤늦게나마 여론의 조명을 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이제는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이번 사건이 ‘피해 아동 보호’라는 중대한 가치를 후퇴시켰다는 점이다.

아이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진심 어린 선의와 연민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이름과 얼굴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지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2차 피해가 생겨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가해 양부모의 친딸인 피해자의 언니는 벌써 신원이 특정되고 있다. 다섯 살인 언니 역시 부모의 학대를 간접 경험한 피해자다. 아동학대처벌법에서 피해자 신상 공개를 금지한 것은 이런 부작용 때문이다.

피해 아이는 자기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해 의사표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이에겐 자신을 대변해줄 가족도 없다. 아동학대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약자 중의 약자였다. 사건의 공론화를 위해 피해자의 인격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빼앗긴 아이에게 공익을 명분으로 또다시 희생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토록 심각한 사건이 석 달 전 ‘생후 16개월 입양아 학대 사망사건’이란 이름으로 보도됐을 땐 왜 주목받지 못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건에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하고 가해자를 악마로 부각시켜 분노의 힘으로 제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수 있다. 여론의 공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사안일이 이런 극약 처방을 손쉽게 동원하는 사회적 관성을 만들었다.

범죄 피해자들은 심리적 안정을 되찾아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아무리 선의라도 피해자의 이름이 언급될수록 ‘낙인 효과’가 생긴다. 사건의 이름은 길고, 밋밋하더라도 가치중립적으로 지어서 피해자를 무대 뒤로 숨겨주는 게 더욱 성숙한 선의다. 피해자는 적절한 시기에 잊혀지고, 사건의 교훈만 남도록 말이다.

신광영 사회부 차장 neo@donga.com
#사건#피해자#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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