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외교관 잇단 망명[횡설수설/이철희]

이철희 논설위원 입력 2021-01-26 03:00수정 2021-01-26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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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 39호실은 김씨 일가의 통치자금, 이른바 ‘궁정경제’를 관리하는 기관이다. 1970년대부터 각종 알짜 기업과 광산, 농어업에서 벌어들인 외화 수입을 관리했고, 위조 달러와 마약 밀매까지 불법 외화벌이는 물론 사치품 조달에 손을 대면서 미국의 대북제재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다. 그 금고지기 역할은 오랫동안 김정일의 중고교 동기동창인 전일춘에게 맡겨졌다. 전일춘은 김정일 김정은 2대에 걸친 39호실장으로서 권력자의 최측근이었다.

▷그런 전일춘의 사위인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대리가 재작년 9월 망명해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망명 시점은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대사대리가 한국으로 탈출하고 두 달 뒤다. 당시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래 유엔 대북제재에 따른 북한 노동자들의 12월 송환 시한을 앞둔 시기였다. 쿠웨이트 대사관은 파견 노동자 관리는 물론 무기 수출과도 관련된 중동의 거점공관이다. 국제사회와 북한당국 양쪽에서 오는 압박은 외화벌이를 책임진 고위 외교관의 탈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북한 외교관은 대부분 당 간부 자녀가 차지한다. 외교관 선발부터 친가 6촌, 외가 4촌, 처가 4촌까지 성분이 좋은 핵심 계층에 속해야 한다. 더욱이 해외에 나갈 땐 수많은 서면보증과 면접, 심사 등 엄격한 검증 절차를 거친다. 그래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국민의힘 국회의원)도 장인이 숙청되면서 해외 발령을 포기했다가 1994년 강성산 총리의 사위 탈북 사건으로 간부 자녀들의 해외 파견이 전면 보류되는 바람에 ‘천운’을 얻었다고 한다.

▷북한 외교관의 잇단 탈북은 독재체제가 핵심부 언저리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몇 년 전까지도 20만 명이 넘던 해외 일꾼들이 대북제재로 대폭 줄어들면서 이제 해외엔 소수 외교관과 무역일꾼만 남아 있다. 외국 생활을 통해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절실하게 느낀 외교관들이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귀국 후 닥칠 현실은 상상하기조차 싫을 것이다. 류 전 대사대리도, 태 전 공사도 자식의 장래 문제를 탈북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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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도 어려서 스위스에서 살았다지만 그건 경호원의 엄호 속에 한정된 경험만 하던, 잠시의 바깥바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한때는 외국물 먹은 젊은 지도자에게 기대를 걸었던 이들마저 집권 10년 차가 되도록 나빠지기만 하는 현실에서 탈출을 결심하는 것이리라. 김정은도 외부인들에겐 “내 아이들까지 평생 핵을 짊어지고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이 말에 내부 엘리트층이 먼저 코웃음 치고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외교관#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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