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준칙인가, 재정변칙인가[동아 시론/김우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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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자 계속 늘면 재정기반 붕괴 우려… 시행령 형태 준칙, 글로벌 기준에 미흡
채무-수지 상한선 기준도 납득 안 가,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준칙 설계하길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6% 수준으로 늘어나는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코로나19 위기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적어도 매 10년마다 40%포인트씩 커진다. 올해 전체 국가채무비율(43.9%)에 육박하는 규모의 부채가 10년마다 늘어나는 셈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재정 기반은 붕괴할 수 있다.

이런 우려에 대응하여 정부가 국가재정법상 의무 사항으로 9월 초 발표한 ‘2045년 채무비율 99%’는 장기 재정전망이 아닌 재정관리 목표에 해당한다. 채무비율이 매 10년마다 22%포인트만 오르도록 제어하겠다는 정부 복안은 관리재정적자를 3% 초반에서 통제해야 달성 가능한 계획이다. 즉, 코로나 위기 종료 시점에 GDP 대비 3% 가까이 재정적자를 축소해야만 한다. 적극재정 기조가 주류가 된 현재 정치 환경에서 예산 삭감과 세입 확충으로 50조 원 넘는 재정을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대안 찾기에 부심하던 우리 사회가 정부의 재정준칙 도입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이 117개국에서 운영하는 표준적인 재정준칙을 원했지만 이런 기대는 정부안이 발표되면서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채무비율이나 재정적자 등을 관리하려면 국민적 합의에 따라 엄격한 기준을 사전에 정하고 대통령 행정부 국회가 이를 반드시 지키도록 법적으로 강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재정준칙 발표문에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정부는 갑작스러운 산식과 의심쩍은 채무-수지 상한, 그리고 이런저런 불명확한 예외 조항들을 시행령에 담았고 이를 운영하는 권한을 재정당국에 위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정부안은 준칙보다는 변칙에 가깝다. 우리나라 미래 재정기반을 맡기기에는 실효성과 진정성이 크게 미흡한 방안이었다.

시행령 형태의 준칙은 의회 권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정치구조에서 재정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기에 부실한 장치다. 재정당국이 권한 위임을 강조하고 싶은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 결과가 실효성 없는 준칙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부는 준칙 운영을 위임받아 매 5년마다 채무와 수지 상한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권한까지 갖겠다고 제안했다. 이것을 과연 연성준칙으로 부를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 국제적 기준에서 정당 간 협약 등을 연성준칙으로 볼 순 있어도, 재정당국 재량으로 처음부터 관리 기준을 정기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은 낮은 단계의 준칙으로 보기도 어렵다.

기존의 중기재정운용계획을 단순히 시행령으로 격상하겠다는 조치는 포스트 코로나 재정 관리의 성패가 걸린 시점에서 유효한 대책이 될 수 없다. 거대 여당에 의해 독점된 의회권력 앞에서 재정관리 권한은 전문 관료집단의 손을 떠나 정치권력의 품 안으로 넘어가기 십상이다. 재정당국은 자신의 권한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국가재정법 이상의 법적 지위를 갖는 재정준칙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부 준칙안의 복합 산식 충족 여부는 국민들이 소수점 단위까지 계산기를 두드려야 알 수 있는 불투명한 구조다. 채무 상한을 초과해도 산식의 곱셈 결과는 규칙 위반이 아닐 수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준칙주의 정신의 왜곡에 있다. 정부안은 2025년 시점에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이 수치를 채무상한으로 설정했다. 반면 재정적자 상한은 GDP의 약 4.5%(관리재정수지 기준)로 여유 있게 정했다. 매년 구속력이 가해지는 재정수지 적자 상한은 충족하기 쉽도록 배려한 대신에 통상 뒤로 갈수록 압박이 강해지는 채무상한은 첫해부터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석연찮은 안배가 혹여 다른 의도를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공명정대해야 할 준칙과는 거리가 멀다. 지출 확대를 요구하는 정치권 압력은 채무상한 초과를 들어 차단하되, 여유 있는 재정수지 상한 등의 장치로 재정당국의 재정운영 재량권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실제 제도 도입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정부는 모순적 동기에 의한 비대칭적 상한의 설정과 이로 구성된 복합 산식, 그리고 불명확한 예외 조항이라는 ‘트릭’ 뒤에 숨어선 안 된다. 준칙주의 정신에 입각해 국민의 신뢰를 토대로 재정정책이 정치적 입김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준칙 제정의 전 과정이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면 재정관리 기준을 사회적 합의에 따라 투명하게 법제화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재정당국은 지금의 정부안보다 더욱 강력한 재정관리 권한도 갖게 된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
#재정준칙#변칙#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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