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의 섬[임용한의 전쟁史]〈122〉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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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26일 미 해병 1사단이 뉴브리튼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뉴기니 동쪽에 있는 길쭉한 섬으로 동쪽 끝에 일본군의 항공대 기지였던 유명한 라바울 요새가 있었다. 미군은 섬의 반대편 끝인 글로스터곶으로 상륙했다. 그 덕분에 저항은 작았지만 라바울까지 도달하려면 구부러진 소시지처럼 생긴 섬을 헤치고 나가야 했다.

그때도 세계를 일주하는 여행객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청년은 바깥세상을 알지 못했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미군 병사들이 아는 남태평양은 정글에는 야자수와 향긋한 열대과일이 가득하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원주민 아가씨가 훌라댄스를 추는 곳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남태평양의 자연은 전혀 달랐다. 다른 수준이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지형과 기후가 그들을 맞았다. 죽음의 함정이 가득한 악취 나는 정글, 진창, 비, 거머리, 벌레, 전염병, 이런 악조건은 모든 섬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지만 섬마다 그중 하나가 더 특별하거나 더 독했다.

뉴브리튼섬의 장기는 비였다. 이 섬은 먹구름의 섬이다. 억수 같은 비가 거의 1년 내내 쏟아졌다. 상륙부대원들은 상륙 한 달 만에 처음으로 태양을 보았다고 한다. 서둘러 젖어 있는 옷과 담요를 펼치자 적기가 습격해 왔다.

비는 진창을 수렁으로 만들고, 무성한 정글을 더 무성하게 만들었다. 일상용품 모두에 곰팡이가 피고, 사람의 피부조차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병사들의 필수품은 해먹이었다. 젖어 있는 땅에는 도무지 몸을 붙일 곳이 없었다. 병사들은 매일 밤 해먹을 묶을 좋은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좋은 나무가 비로 약화된 지반 때문에 통째로 쓰러져 병사를 덮쳤다. 굵고 튼튼한 나무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을 나무를 찾아야 했다.

반세기 전 남태평양 이야기에서나 읽었던 장면이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장마철에 일주일 내내 내리는 비는 경험해 보았어도 일주일 내내 퍼붓는 폭우는 처음 경험해 본다.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는 20년 전부터 있었다. 인간이 천재지변을 완전히 방비할 수는 없겠지만, 무시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외면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임용한 역사학자
#뉴브리튼섬#비#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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