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국민은 공직자의 사상 ‘알 권리’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5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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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색깔론’ 소리가 나올 줄 알았다. 통일부 장관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신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정될 때부터 예상된 바다. 23일 인사 청문회가 끝나고도 여당은 “(야당이) 색깔론에 빠져 정책 검증 아닌 사상 검증을 한 것을 국민께 사과하라”며 야당을 거세게 공격했다.

1980년대 말 전대협의 주류는 주사파였고, 주사파가 북한 주체사상을 신봉했다는 건 팩트다. 1987년 전대협 초대 의장 이인영도 주체사상을 신봉했는지, 지금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국민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하다. 색깔론 무섭다고 야당이 안 물으면 그게 야당인가.

● 운동권 86그룹은 특권계급인가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는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과 답하는 이인영 후보자.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통일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는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과 답하는 이인영 후보자.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의 질문에 이인영은 답했다. “그 당시에도 주체사상 신봉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말씀드린다.”

그러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인영은 까칠하게, 굳이 토를 달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가 태 의원님께서 저에게 사상전향을 끊임없이 강요하거나 추궁하는 행위로 착각되지는 않기 바란다.”

청와대 출신 윤건영 의원의 반응은 더 까칠했다. “오늘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이인영 후보자 같은 독재 시절 젊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며 “그렇게 함부로 폄하할 대상도, 천박한 사상 검증의 대상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운동권 86그룹은 무슨 특권계급이라도 된다는 소리 같다.

● 과도한 부정은 신뢰를 떨어뜨린다

정계 입문 전이던 1998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졌던 종로를 찾아 둘러보던 이인영 전 전대협 의장.
정계 입문 전이던 1998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졌던 종로를 찾아 둘러보던 이인영 전 전대협 의장.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가 이인영을 주사파로 간주하고 추궁한다는 느낌에 집권세력이 불쾌했을 순 있다. 그러나 이인영도 미심쩍은 답변을 한 게 사실이다.

1980년대 북한 대학을 다닌 태영호가 “북에선 전대협 조직원들이 매일 김일성 초상화 앞에서 충성 의지를 다진다고 가르쳤다”고 하자 이인영은 과도한 반응으로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저는, 제가 알기로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그때 충성 맹세했던 사람들이 숱하게 고백했는데 의장만 몰랐나….)

“전대협 의장인 제가 매일 아침에 김일성 사진을 놓고 거기에서 충성 맹세를 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다, 이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했으면 했다, 안 했으면 안 했다…가 아니라 기억이 없다는 건 무슨 의미야….)

● 공인의 이념 공개돼야 한다는 대법 판결

“국민들 앞에서 솔직히 나는 이제 주체사상 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게 그렇게 힘든 말이냐”는 태영호가 그들에게는 사상전향 강요로 보였을지 모른다. 한겨레신문 24일 사설은 ‘헌법 19조의 양심의 자유에는 누구도 내면의 생각을 강제로 드러내도록 억압받아선 안 된다는 원칙이 포함돼 있다’고 썼다. 사상을 밝히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의미일 터다.

그러나 국민은 공인의 사상과 정치적 이념을 알 권리가 있다. 대법원 판례가 나온 지 오래다. 공적인 존재의 정치적 이념은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공적인 존재가 가진 국가·사회적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존재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국가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그 존재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더욱 철저히 공개되고 검증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은 그 개연성이 있는 한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가 허용되어야 하고 공개토론을 받아야 한다.”(대법원 2002.1.22. 선고)


● 정치적 이념 위장, 지금은 없을까

1997년 우파 잡지 한국논단이 보도한 ‘노동운동인가, 노동당운동인가’ ‘공산당이 활개 치는 나라’ 등의 기사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판결이다. 국민의 알 권리는 주로 언론을 통해 실현되고,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취재·보도한다. 민변 등이 허위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한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언론자유의 손을 들었다.

특히 판결문에서 “사람이나 단체가 가진 정치적 이념은 흔히 위장하는 일이 많다”고 적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위장인지 아닌지 국민이 제대로 알기 위해선 의혹 제기나 주관적 평가 역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86그룹 집권세력이라 해도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상 검증에서 제외될 순 없다. 공직자의 이념과 가치, 역사 인식, 과거의 공적 활동은 그 사람의 현재와 미래 공직 수행에 영향을 미친다. 더욱이 20대의 생각과 정서, 습관과 경향은 거의 평생토록 원형을 유지한다. 그래서 국민이 알아야 한다는 거다.

● 이념은 공직 수행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대 이준웅 교수(언론정보학)는 “언론이 공직자의 도덕성과 사생활 보도에 집중해 공직 관련 능력을 소홀히 보도한다지만 ‘공직자’ 개념 자체가 ‘개인과 공적 임무’라는 두 영역의 결합”이라고 했다. 공직자 인사 검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2014년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다(이인영 아들의 병역 문제도 그래서 중요하다).

1989년 6월 29일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이 한양대에서 임수경(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평양축전 참가 사실을 밝히는 모습.
1989년 6월 29일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이 한양대에서 임수경(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평양축전 참가 사실을 밝히는 모습.
이인영은 다른 부처도 아닌 통일부의 수장이 될 사람이다. 그의 이념은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선전기관에선 “리인영, 임종석(전대협 3기 의장)에게 거는 기대가 많다”며 우리민족끼리 철학과 미국에 맞설 용기를 주문했다.

북에선 핵무력을 포기하지 않는데 이인영은 대동강 맥주와 우리 쌀을 교환할 뜻을 밝혔다. 한미 연합훈련도 연기됐으면 좋겠다고 ‘개인적 입장’을 밝혔다. 미 제국주의가 철천지 원수라며 주한미군 철수를 외친 게 주사파였다. 앞으로 어떤 상상력을 더 발휘할지 더럭 겁이 나는 이유다.

● 색깔론에 굴복하는 쪽이 지는 거다

이인영을 비롯한 86그룹 집권세력은 전대협 운동 경력으로 정치권에 쉽게 진입한 까닭에 역사적 반성을 해본 적이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쉽게 집권한 까닭에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세상 변화에 눈 감고 그냥 그 길로 매진할 뿐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찾아온 태영호를 그들은 ‘변절자’로 매도했다. 당신들이 색깔론을 휘두르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공직자의 이념을 따질 자유, 알아야 할 권리 역시 훼손될 수 없다. 색깔론 공격이 두려워(혹은 더러워) 입을 다물수록 대한민국은 전체주의 북조선처럼 가는 것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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