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 회화’ 명성 드 생팔, 그녀가 붓 대신 총을 든 까닭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8일 15시 27분


“1961년 난 아버지를 향해 총을 쐈어요. 내가 총을 쏘는 이유는 총 쏘기가 재밌고 나를 최고의 기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죠.”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의 자백 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사격 회화’로 명성을 얻은 니키 드생팔이 한 말이다. 그녀는 왜 붓이 아닌 총을 든 걸까? 그 총구는 왜 아버지를 향했던 걸까?

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니키 드생팔은 일명 ‘사격 회화(Shooting Painting)’로 프랑스 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물감 주머니를 감춘 흰색 부조에 총을 쏘아 물감이 사방에 튀고 흐르게 하는 전위적인 추상화로, 작가의 어릴 적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작품이었다.

드생팔의 아버지는 프랑스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아름답고 부유한 미국인이었다. 빼어난 미모로 유명 패션잡지 모델로 활동했던 드생팔은 일찌감치 결혼해 아이도 낳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남모를 고통이 늘 자신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급기야 우울증이 심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겉보기엔 유복하고 귀하게 자랐을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편의 바람기로 우울증이 심했던 엄마는 어린 그녀를 종종 때렸고, 아빠도 딸을 호되게 대했다. 그러다 11살 때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그녀를 범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이후 20년간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31살이 되던 해 ‘사격 회화’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끔찍했던 과거를 공개적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총 쏘기는 아버지뿐 아니라 자신을 억눌러왔던 가부장제에 대한 복수이자 분노의 표출이었다. 또한 자신 안에 잠재된 폭력성을 미학적으로 해소하는 치유의 방법이었다.

‘사격 회화’의 성공 이후 드생팔은 영역을 확장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에 도전했고 성취했다. 만약 그녀가 총 쏘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치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20세기를 빛낸 중요한 여성 미술가 한 사람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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