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의 난’이 남긴 숙제[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7일 03시 00분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긴급재난지원금이 전 가구 지급으로 가닥이 잡힌 과정은 여당이 ‘홍남기의 난’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예스맨’ 홍 부총리가 ‘70% 지급’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완고하게 버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총리의 경고가 있은 23일 기획재정부가 항복문서 격의 보도자료를 발표함으로써 상황은 봉합됐지만 홍 부총리의 저항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위기 이후 차기 국회와 새 경제팀이 풀어야 할 숙제들을 던져 놓았다.

재난지원금 논란은 당정 갈등과 여야 정쟁이 뒤섞이면서 그 초점이 재원 조달 방식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 사안의 본질은 추가 소요분을 적자국채로 메울지 아니면 기부금으로 충당할지가 아니었다. 기재부는 이미 경기 방어를 위해 283조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올 한 해 국가예산의 절반이 넘는 돈이다. 이런 판국에 3조, 4조 원을 어떻게 끌어올지는 곁가지다. 홍 부총리가 “무조건 재정을 아끼자는 것은 아니다”고 한 건 그래서 진정성 있는 강변이다.

핵심은 재정 투입 원칙이다. 한국은 대표적으로 재정이 건전한 나라다. 과거 개발연대 시절 우리는 비료공장 하나 지을 돈이 없어 곳곳에서 해외차관을 끌어다 썼고, 전 국민을 동원해 민간저축률을 끌어올렸으며, 심지어 수출업체가 벌어온 달러까지 무조건 중앙은행에 먼저 넣으라고 했었다. 이런 경험과 노력이 지금의 재정 여력을 만들어 놓았다. 여당은 기재부가 논리적 근거도 없이 ‘국가채무비율 40% 사수’라는 집단 도그마에 갇혀 있다고 비난하지만, 그나마 40%라는 저항선을 설정해 놓았기에 위기 때마다 재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번 재난지원금 대상은 하위 50% 지급에서 출발해 총선 과정에서 70%로 확대됐다가 100% 지급으로 귀결됐다. 70% 확대로 기울었을 당시 한 기재부 고위 관료는 “이번 위기 상황에서도 실직 걱정이 없는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만이라도 지원 대상에서 빼야 할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이 말은 정부가 아니라 세입세출을 감시·감독하라고 만들어놓은 국회에서 나왔어야 했다.

반대로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선 1929년 대공황을 교훈 삼아 재정을 대거 방출하는 뉴딜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많다. 이 역시 귀담아들을 말이다. 굳이 대공황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고령화와 저성장 때문에 재정 지출을 좀 더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도입 여부를 생각해볼 때가 됐다. 하지만 미국이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게 1932년 도입한 뉴딜 덕분인지, 뒤이어 터진 제2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시경제 특수(特需) 덕분인지는 아직까지 논쟁적 주제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남미의 많은 나라도 곳간이 거덜 나도록 재정을 풀었지만 지금은 경제가 결딴나 있다.

홍 부총리가 내놓은 숙제가 이런 것들이다. 국가부채를 얼마나 용인할지, 그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지, 효율적인 재정 전달 방식을 어떻게 구축해갈지 말이다. 유럽 경제의 우등생 독일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가채무비율이 60%대에서 90%대로 높아졌지만 재정적자 증가율을 제한하는 강력한 재정준칙으로 이 비율을 다시 70%대로 끌어내렸다. 채무비율 40% 사수가 도그마에 불과하다면 이를 대신할 뭔가를 제시하고 동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게 정치권의 역할이다. 선거 때마다 증폭되고 있는 포퓰리즘적 재정 방출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통제하고 견제할지도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채무비율 낮으니까 많이 써도 된다’는 논리는 위기 상황에선 맞지만 위기 이후엔 포퓰리즘으로 읽힐 수 있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홍남기#긴급재난지원금#국가채무비율#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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