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꽃[이준식의 한 시 한수]〈47〉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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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들지 않은 곳일지라도 푸르름은 때맞춰 저절로 오기 마련. 이끼꽃, 쌀알만큼 자그마해도 모란처럼 활짝 꽃 피우는 걸 배우네. (白日不到處, 靑春恰自來. 苔花如米小, 也學牡丹開.) ―‘이끼(태·苔)’·원매(袁枚·1716∼1797)

이끼가 꽃을 피운다? 그저 축축하고 비릿하고 물컹물컹한 이끼 더미에서 활짝 핀 꽃송이를 떠올린 발상이 기발하고 섬세하다. 꽃이라면 화사한 복사꽃, 풍성한 모란, 정갈하고 오뚝한 목련쯤을 연상하련만 시인은 쌀알만 한 이끼꽃에 마음의 눈길을 보낸다. 따스한 햇볕 세례도 가꾸는 이의 정성도 제대로 향유해 본 적이 없는 이끼, 모란처럼 활짝 꽃 피우겠다는 포부가 당차다. 시인에게 있어 이끼의 개화는 다가올 미래의 꿈이다. 그러기에 이끼는 모란처럼 풍성한 개화를 바지런히 ‘배우고’ 있다. 하고많은 꽃 가운데 굳이 꽃 중의 제왕이라는 모란을 답습하겠다는 꿈이 그래서 더 야무지다. 눈길 주기가 쉽지 않은 이끼를 향한 자분자분한 목소리에서 무수한 ‘흙수저들’의 적막함을, 그러나 다가올 저들의 개화를 다독이는 시인의 웅숭깊은 마음을 읽는다.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더 무성해지는 이끼, 그 누구로부터 일말의 주목인들 받았으랴. 소외와 낙오의 상처를 다반사로 겪었을 테지만 묵묵히 혹은 악착같이 자기 역량으로만 푸름을 키운 끈질긴 생명력은 범접하기 어려운 경이라 할 만하다. 시인 김경성의 ‘이끼’에도 그런 경이가 엿보인다. “썩은 나무의 등걸을 지나 동굴 속까지/너른 바위 안쪽까지/철퍽철퍽 미끄러지는 물 잔등이어도/마른 입술 툭툭 터지도록 긴 가뭄이어도/몸 깊숙이 남겨놓은 자리가 있어/후드득 지나가는 빗방울 몇 개만 있어도/순식간에 그대 곁으로 달려간다, 달려간다.”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끼꽃#이끼#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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